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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규 Jul 15. 2018

[에세이/수필] 아재가 트와이스 이모티콘을 쓰면 노망?

우리의 로망은 언제부터 노망으로 변질되는 걸까

트와이스를 로망하는 아재의 팬심은 '노망'인 건가요? 

우리의 로망은 언제부터 노망으로 변질되는 걸까


* 이 글은 이동규 작가가 시민기자 자격으로 언론사 '오마이뉴스'에 송고한 기사 글의 원본입니다.

http://omn.kr/rz3j


<풋풋한 청춘 vs 불타는 청춘> : 로망에도 유통기한이 있나요? (출처 : 롯데ENT, SBS)


로망과 노망 사이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던 중이었다. 승강기가 10층에서 멈추더니 문이 열리고 노부부가 들어섰다. 할머니가 살짝은 상기된 목소리로 할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얼마 전에 보니까 주간 경비가 바뀌었더라고. 젊은이던데, 키가 아주 훤칠하고 잘생긴 것이 볼 때마다 기분이 다 좋더구먼.”     


곧이어 할아버지가 혀를 끌끌 차며 대답했다.     


“이 할망구가 노망이 들었나?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 사람들 다 있는데!”     


그 뒷얘기는 제법 살벌하게 전개된 관계로 이쯤에서 함구하도록 하겠다.     


며칠 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선후배 동창들끼리 모인 단톡방이었는데 나이 지긋한 선배 중에 한명이 요즘 대세 걸그룹인 트와이스의 이모티콘을 사용했다. 자기 아들이 좋아하는 연예인들이라 관심을 가지고 보다보니 자신도 팬심이 생겨서 구입했다는 것이다.      


직언이 트레이드 마크인 후배 하나가 이번에도 여지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발휘했다.     


“선배, 중딩들이 그러면 로망이지만 선배 나이대가 그러면 노망이에요.”     


순간 나도 여차저차한 사유로 소장만 하고 있을 뿐, 지금껏 계면쩍어서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한 레드벨벳 이모티콘을 이번 기회를 틈타 클릭하려다가 얼른 멈췄다. 조금만 내 손이 후배보다 빨랐다면 ‘노망 세트’ 1+1이 될 뻔했다.          


'트와이스 이모티콘' (출처 : 카카오톡)


로망을 갖는 데에도 유효기간이 있는 겁니까     


‘노망’과 관련된 일련의 에피소드를 겪다보니 불현듯 이런 의구심이 일었다.      


'로망을 가져도 죄가 되지 않는 나이대가 있는 것일까? 만약 있다면 대체 몇 살부터 로망이 노망으로 산화되는 것인가?'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할머니나 단톡방의 선배도 한때는 자신들의 취향이나 바람을 마음껏 얘기한들 그것이 전혀 비난거리가 되지 않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비록 남들이 볼 때 그들의 취향이나 바람이 그들의 이미지와 맞지 않더라도, 그저 저 인간 나름대로 삶을 낭만적으로 즐기는 방식이려니 하고 뭇사람들로부터 이해받았을 테다.     


‘로망’은 영어 낭만적(Romantic)에서 파생한 한국식 은어다. ‘낭만(浪漫)’이라는 한자어를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물결이나 파도 따위가 어지러이 흩어지거나 일렁이는 것’을 뜻한다. 한마디로 마음이라는 물결이 이끌고, 가슴이라는 파도가 시키는 일들에 스스로 진솔하게 귀 기울여 보는 일이 낭만이고 로망인 셈이다.   

  

반면 한 글자 차이이기는 하지만 ‘노망’은 부정적인 단어다. ‘노망(老妄)’이라는 말 역시 한자어 그대로 풀이하자면 ‘늙어서 허망한 일’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나이든 사람이 분수에 맞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보일 때 “노망들었다”고들 한다. 속된 표현으로 추태나 꼴불견이다.     


사람들은 흔히 로망을 젊음과 결부시키고는 한다. 20대 대학생이 대뜸 휴학계를 내고 1년간 무인도나 오지로 여행을 떠났다한들, 우리는 그를 두고 노망났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낭만적인 탐험가라 칭송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50-60대 돌싱이 평생 갑갑하게 한국에서만 애정 어린 인간관계를 맺어왔던 일에 분개하여, 이제부터 낭만적인 자유 연애주의자가 되겠다며 유럽 한복판으로 이민을 떠난다면 우리는 그 인간을 두고 노망났다고 말할 가능성이 크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마음과 가슴이 일렁이는 대로 삶을 띄웠을 뿐인데 왜 이토록 상반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 둘의 차이는 단지 풋풋한 청춘이냐 ‘불타는 청춘’이냐, 그뿐인데 말이다.         

 

영화 <서른 아홉 열 아홉> : 연상녀와 연하남의 사랑 이야기 (출처 : EuropaCorp)


인간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평생!     


어쩌면 우리 인간들은 나이를 감옥 삼아, 스스로가 가진 가능성의 한계를 계속 잘라내면서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10대, 20대, 30대가 되어갈수록 사람은 점차 깨닫게 마련이다. 내가 최선을 다해도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 일은 늘 있게 마련이고, 내가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끝내 내 것이 되지 않는 것들도 있다는 사실들을 말이다.     


또 속칭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살아버릴 때, 경제력․부양가족․노후 등등 감내해야 할 리스크가 급증한다는 사실도 체감한다. 그래서 웬만큼 간 큰 사람이 아닌 이상 어느 순간부터는 가슴이 나대는 대로 살 수가 없다.     


이렇게 우리 인간들은 실패와 위험을 연습하는 동안 젊은 시절의 로망들을 가지치기해나간다. 나이가 들면 낭만이 남만도 못한 것처럼 여겨지는 이유다.     


흔히들 “낭만이 밥 먹어 주냐”고들 핀잔한다. 말이야 맞는 말이다. 살다보면 육신을 호강시켜주는 것은 돈이지, 가슴 설렘이 아님을 절감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는 말도 있다. 인간은 밥 말고 가끔씩 꿈이나 희망, 소망 등등 씹을 수도 마실 수도 없는 것들을 먹고파한다. 설령 그러한 로망거리들이 한낱 신기루에 불과할지언정 ‘한때나마 설레었다’는 사실 만으로 꽤 오랜 기간 포만감을 느끼기도 한다.     


어쩌면 로망을 추구하는 노년이나 중년층도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다. 젊고 잘생긴 경비를 좋아한들 이제 와서 소싯적의 이상형을 찾아 나설 열정이나 의욕 따위는 사라진지 오래라는 것을, 트와이스를 백날 좋아하여 팬클럽 회장이 된다한들 사나 없이 사나마나한 제2의 인생 따위는 불능이라는 것을 말이다.     

엘리베이터의 할머니나 단톡방의 선배가 내뱉은 그 ‘문제적인 발언’들은 시쳇말로 그들이 그냥 한번 내뱉은 말들일 테다. 어차피 허망한 줄 뻔히 알면서도 그래도 잠시나마 가슴 설렌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을 장난스럽게 즐기기 위해서다.          


KTF 광고 中


기부하는 셈치고 취존해주는 문화     


미디어에서는 한동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연신 국민들을 계몽했다. 우리도 그에 세뇌되어 툭하면 이 계몽 문구를 버릇처럼 써댔고, 지금도 곧잘 써먹는다. 엘리베이터의 할아버지도, 직언이 좌우명인 단톡방의 후배도, 아마 이 광고 문구를 최소 1번 이상은 누군가에게 교훈조로 써먹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 한편에서는 나이든 사람들의 로망을 너무도 쉽게 노망으로 폄훼하거나 조롱하는 문화가 여전한 것도 사실이다.      


늙고 힘이 없어질수록 낭만을 현실화시킬 가능성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드는 것은 맞다. 그러나 가능성이 0%라고 확신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이상, 그들의 ‘취향 is 뭔들’ 최소한 들어주는 척이라도 해주고 고개 한번 끄덕여주는 것이 인지상정 아닐까.     


‘학업 적령기’ ‘취업 적령기’ ‘결혼 적령기’ 등등 적령기, 즉 무엇인가를 하기에 적절한 나이를 강요하는 분위기가 이미 질식할 만큼 팽배해진 사회 아니던가. 그러니 제발, 적어도 로망을 꿈꾸는 데만큼은 적령기 콤플렉스에서 잠시나마 홀가분해져보는 것이 어떨까.      


반사회적이라든가 범죄가 아닌 이상 그 사람의 나이가 적든 많든 기부하는 셈 치고 그냥 눈 딱 감고 한번 해주자, ‘취존’(취향 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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