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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규 Aug 10. 2018

현대인들의 산책 문화와 옛 사람들의 걷기 생활

'느림의 미학'에 대비되는 생존과 노동으로서의 걷기 

산책하는 현대인들은 쉬이 알지 못할 옛 사람들의 걷기 생활 

'느림의 미학'에 대비되는 생존과 노동으로서의 걷기

* 이 글은 이동규 작가가 시민기자 자격으로 언론사 '오마이뉴스'에 송고한 기사 글의 원본입니다.

http://omn.kr/s68b


산책하는 시민들 (분당 정자동 탄천에서) 

      

오로지 걷기만 허락된 삶     


지난 2016년에 작고한 이탈리아의 중세학자 겸 소설가였던 움베르토 에코는 유럽을 여행하는 중에 어느 도시나 마을에 머물 때면 가급적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두발과 두 다리로만 이동하며 생활할 때 비로소 중세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그네들이 느꼈던 당시의 감정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분명 휴식을 취하려고 여행을 갔음에도 불구하고 중세학자라는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은 것을 보니, 그는 가히 프로 중의 프로라고 할만하다.     


어느 프랑스 문학잡지에서 그가 인터뷰한 이 내용을 읽은 뒤부터, 나도 가끔 해외여행을 할 때 그 나라의 소도시에 한동안 머물 때면 일부러 걷기 삼매경에 빠져보았다. 한손에 구글 맵을 켠 채 지근거리는 물론이고, 대략 수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까지 그야말로 ‘툭’하면 걸어 다녀보았다. 가끔 자전거를 빌려 타는 꼼수를 부린 적은 있지만, 양심상 차는 타지 않았다.     


항상 유럽 지역만 갔던 것은 아니라 종종 에코가 경험했던 고색창연한 유럽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공간을 누비고 다닌 적도 많지만, 어쨌든 그렇게 시종일관 걷기를 생활화하다보니 적어도 그가 말한 ‘중세적 마인드에 대한 공감’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도 같았다.           


걷기, 장거리에는 비효율적인 이동 수단


걷기가 생필품이었던 옛 시절     


걷기는 물론 좋은 ‘운동’이다. 신체를 건강하게 단련시켜 주고, 이동하는 동안 천천히 주변을 음미하게 만들어 마음에 여유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늘 바쁜 일상에 치어 주변의 모든 사물과 사건들을 그저 스치듯이 보낼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에게, 걷기 행위는 그야말로 스스로를 새롭게 돌아보게 하는 ‘느림의 미학’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세의 사람들에게도 걷기가 미학의 문제였을까 싶다. 그나마 말과 수레 등 대단찮게나마 교통수단이라도 이용할 수 있었던 귀족이나 상인 계층에게는 걷기가 어느 정도 기분전환거리였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러한 교통수단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평민 이하의 지역민들에게는 걷는다는 행위 자체가 삶의 일부였고, 노동의 일부였을 테다. 그것도 결코 우아하거나 실용적이지 않은, 투박한 삶과 비효율적인 노동으로서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투박함과 비효율성은 그들에게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내몰리듯 이미 떠안겨진 필연적이고도 운명적인 족쇄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 길과 순례 객들


신체의 한계를 느끼는 좁고 디테일한 세상     


실제로 나 역시 중세 사람들처럼 종일 걸어서만 다니다보니 하루 중에 운신할 수 있는 범위가 무척 협소했다. 길어야 내가 묵었던 숙소에서 반경 5km 내외 정도랄까. 그조차도 한번 왕래하고 나면 녹초가 되어버려서 그 다음날은 피로 때문에 늦잠을 자기 일쑤였다.     


때문에 둘러볼 수 있는 관광 장소 역시 결코 많을 수가 없다. 물론 찾아가는 장소가 몇 군데 안 되기 때문에 장소마다 무척 꼼꼼히 탐색한다는 장점은 있었지만, 너무 좁고 깊게 탐구하는 날들이 계속되다보니 내가 마치 여행을 하는 중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의식 하에 연구나 수행을 자처하고 있다는 기분도 들었다.     


예전에 산티아고 순례 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한 적이 있다. 순례 길을 완주한 순례 객들을 대상으로 인터뷰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소감은 제각각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무엇인가 공통점이 있었다.      


길고 삭막한 순례 길을 하염없이 걷다보니 본인이 한없이 작고 무력한 존재처럼 여겨진다는 점과, 그에 맞춰 자신들의 세계관도 전과 다르게 더욱 소박하고 경건하게 바뀌었다는 점이다. 나는 비록 종교인이 아니라서 그들이 말한 소박하고 경건한 세계관을 정확히 공감했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내가 외국의 소도시를 여행하면서 알게 됐던 ‘좁고 디테일한 세상’과 어느 정도 비슷한 맥락이 있지 않을까 짐작해보는 바다.     


모르기는 몰라도 중세 사람들이 가졌을법한 세계관도, 그리고 움베르토 에코가 부러 체험하려했던 중세인의 세계관도,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오로지 걸어서 파악할 수밖에 없던 사람들의 ‘물리적인 한계와 불편함’이 아니었나 싶다.      


차를 타고 단박에 먼 거리를 갈 수 있지만 운동 삼아 걷기 행위를 택하는 현대인이 느끼는 삶과, 빠르고 성능 좋은 교통수단이 전무한 상태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이 오로지 걸어서 먼 거리를 가야만 하는 중세인의 삶은 결코 그 결이 같을 수가 없다. 전자의 걷기 행위가 그저 도락(道樂)이라면, 후자의 그것은 일종에 고행이나 다름없다.          

분당 정자동 천변


도락(道樂)이 되어버린 현대의 걷기 생활     


내가 사는 분당구에는 천변이 있다. 천변 주변에 조성된 도보와 자전거 길에는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하는 이들로 분주하다. 개중에는 하루 종일 앉아있었거나 차를 타고 다니느라 허약해진 다리를 단련시키려 나온 이들도 있을 테다. 또 개중에는 복잡해진 생각들을 정리하거나, 허우룩해진 마음을 달래러 나온 이들도 있을 테다.     


이제 현대인들에게 걷기는 더 이상 생필품이 아니다. 일상의 시작부터 끝까지 우리는 자가용이든 대중교통이든 대부분 차에 의존해 몸을 움직인다.      


그래서 우리에게 걷기는 삶의 보조재다. 누군가에게는 체력을 단련시켜주는 보조재이고, 누구에게는 휴식이나 안식을 취할 때 즐겨 쓰는 보조재다. 오늘날의 어느 누구도 ‘중세적 마인드’로 길을 걷는 이는 없을 것이다.          

문명화된 교통수단들로 하늘을 걷는 현대인


발과 다리를 대체한 문명     


내 집 앞이 바로 천변인지라 종종 해가 뉘엿뉘엿 저물 즈음에는 벤치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는 한다. 그리고 열심히 땀을 흘리며 스치는 이웃들, 또는 하하 호호 만면에 웃음을 띠며 걷는 이웃들을 보며, 가끔은 우리 인류에게 ‘걷기’가 본래 어떠한 의미였는지를 떠올려본다.      


석양 무렵에 무리를 지으며 걷는 다는 것이 과연 근대 이전의 우리 선조들에게는 어떠한 기분을 선사했을까? 안도감보다는 불안함이, 홀가분함보다는 막막함이, 즐거움보다는 고됨이 앞서는 기분 아니었을까?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제는 별보다 인공위성이 더 많이 반짝거리는 밤하늘을 보고 있자니, 그동안 인류가 발전시킨 교통수단에 오늘만큼은 감탄이 절로 인다.      


이제 인간은 소박한 땅 위가 아니라 도발적이게도 하늘과 우주를 걷는다. 동물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발이 느렸던 인간이 이제는 지구상의 어느 생명체보다 빠르고 넓게 움직인다.     


문명의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고, 혹자는 발전하는 문명 덕에 언젠가 우리 인류가 폐망할 것이라 우려하고 있지만, 적어도 ‘걷기’의 효율성을 따져보는 오늘만큼은 문명의 장점을 “아주 칭찬해”주고 싶다.      


현세를 떠난 현자 에코가 아마도 저승에서 중세 사람들을 만나 현대인들의 걷기 문화를 이미 말해줬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물리적인 세계관은 이제 더 이상 무력하지도, 마냥 경건하지만도 않다고 말이다.      


문득 중세 사람들이 어떻게 대답할까 궁금해진다. “말세로구나!”일까. 아니면, “그것 참 부럽네!”일까. 

         


※ 전달 및 공유는 자유로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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