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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le Ale Jul 04. 2022

파친코, 코리안 디아스포라

소설과 드라마

애플tv의 드라마 파친코에 대한 넘치는 극찬을 접하다 보니 드라마를 꼭 봐야겠다는 사명감까지 생겼다. 소설을 기반으로 하는 영상물은 텍스트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에 드라마를 보기 전에 소설을 먼저 읽었다.


일제강점기 부산 영도에서 시작하여 1989년 일본 오사카까지 4대를 이어 펼쳐지는 가족사는 충분히 감동적이고, 일제 수탈의 아픈 기억을 호출해내며, 끈질기고 강인한 여성의 모습을 주인공 선자를 통해 그려낸다. 일본에서 한국인, 자이니치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일이었는지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지만, 우리는 재일동포에 대한 일본 사회의 차별은 너무 많이 들어서 익숙한 일이기에 다소 진부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머리로만 알고 있었던 사실을 가슴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이 소설 파친코의 미덕이다.


드라마는 소설의 기본 얼개를 갖고는 있지만, 등장인물의 설정과 이야기의 전개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소설은 시대순으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드라마는 1989년과 과거를 지속적으로 교차 편집하여 전개된다. 추측컨데 다분히 미국 시청자를 염두에 둔 시나리오였지 않을까 싶다. 소설처럼 시대순으로 전개가 되었다면 영어 대사는 거의 끼어들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선자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기본 축은 동일하지만, 선자의 캐릭터도 소설보다는 드라마에서 더욱 능동적이고 당차고 억센 모습으로 그려진다. 고한수는 더욱 극적으로 묘사가 되는데, 소설에는 없는 내용이 드라마 한 편을 온전히 차지하고 있다. 소설에는 전혀 없는 관동대지진을 다루면서 일본인들이 재일조선인들에게 행한 만행을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한 설정인데, 그렇기에 드라마에서 고한수는 소설과는 사뭇 다른 캐릭터로 다가온다. 


소설에서 중요한 인물인 노아는 드라마에서는 아예 삭제된 것이나 다름없다. 노아는 선자가 고한수를 만나고, 이삭과 결혼을 하고 오사카로 건너가고, 고한수가 끝까지 집착하게 만드는 중요한 인물인데, 드라마에서는 어린 노아가 선자의 일본어 통역으로 잠깐 등장할 뿐이다. (시즌2 제작이 결정되었다고 하니, 계획된 각본이었을 수도 있지만) 


경희는 수동적인 인물로 드라마에서 묘사되는데, 소설에서도 선자와 대비되어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인물로 그려지기는 하지만, 훨씬 더 강인한 인물이다. 경희의 남편이자 이삭의 형인 요셉도 소설과는 상당히 다르게 드라마에서 묘사된다. 비록 가부장적 권위가 없지는 않지만 소설에서는 훨씬 더 포용력 있고 사려 깊은 인물인데 비해 드라마에서는 상당히 평면적인 인물로 그려졌다.


소설과 드라마의 차이를 짚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전체적으로 평을 하자면, 소설보다 더 뛰어난 드라마라고 하겠다. 소설은 잔잔한 인물 묘사와 이야기 전개가 미덕이라고 한다면, 드라마는 훨씬 더 역동적이고 직설적이다. 일제의 만행도 소설보다 드라마에서 더 직설적이고 과감하게 그렸다. 


지극히 한국적인 주제를 미국 애플tv에서 과감한 투자를 감행한 것이 얼핏 의아할 수도 있지만, 소설이 다루고 있는 주제를 보면 미국 사회에서도 지극히 보편적인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충분히 이해가 된다. 주류 일본인들이 소수 조선인에게 행한 차별과 멸시는 곧 미국 사회에서 주류 백인과 소수인종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차별과 소외도 보편적으로 공감을 불러오는 주제이다. 일본이 조선에 행한 만행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근대 초입에서 열강 제국들이 식민 통치를 하며 보여줬던 그것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소설은 지극히 보편적인 주제를 주인공 선자의 삶을 통해 구현해 냈기에 드라마 제작에 확신을 주었을 것이다. 더불어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한국 문화 바람도 한몫 단단히 했을 것이고.


한국인들에게는 자이니치들이 겪은 차별과 모멸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감정이입을 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은 드라마겠고, 한국인을 제외한 다른 모든이들에게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보다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될 드라마이다. 일본인들에게는 뼈아픈 일침이겠고. 


아쉬운 점은 윤여정이 연기한 1989년의 선자이다. 소설을 읽을때 선자는 담담하게 주어진 환경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읽었는데, 윤여정의 선자는 훨씬 더 강한 자의식의 소유자로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소설 속의 선자에게 더 공감이 갔기에 드라마에서 아쉬운 대목이다. 젊은 선자를 연기한 배우는 어떻게 칭찬을 해도 모자랄 정도로 빼어난 연기를 보여줬다. 소설 속 선자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지만, 드라마의 선자는 소설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었다. 


솔로몬의 캐릭터도 아쉬움이 남는데, 아마도 그의 한국어 대사가 자이니치의 한계를 처절하게 깨달아가는 미묘한 감정을 표현하기에는 다소 어색하게 느껴져서였을 듯하다. (이것은 사실 과도한 비평일텐데, 일본어와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동시에 어눌한 한국어로 미묘한 감정까지 표현해 낼 수 있는 배우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에. 아마도 한국어를 모르는 시청자라면 느끼지 못할 점이기도 하겠다.)


소설을 영상화하는 것은 언제나 지난한 작업이다. 소설의 감흥을 제대로 살려낸 영화는 흔치 않다. 소설이 자극하는 독자 개개인의 상상력을 스크린에 구현된 영상이 여지없이 짓밟아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원작의 캐릭터와 스토리에 변화를 줘서 빼어난 드라마로 만들어낸 솜씨에 찬사를 보낸다.


P.S. 드라마 시리즈를 시청할 때, 오프닝 시퀀스는 대부분 첫화 정도만 보고 건너뛰는데, 파친코는 오프닝 시퀀스를 한번도 건너뛰지 않았다. 오프닝 배경 음악 제목이 Let's Live for Today인데, 선자의 삶을 생각할 때 지극히 적절한 제목의 음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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