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이 사라진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를 지날 때
폴 세잔의 대표작 <사과 바구니> 앞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거장의 작품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묘하게 뭔가가 안 맞는다고 느껴지는 부분들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림 속 등장하는 정물들은 어딘지 모르게 '사실 그대로'를 그린 것 같지가 않다. 탁자의 왼쪽과 오른쪽 선이 맞물리지 않은 채 어긋나 있다던가, 겹겹이 쌓인 하얀 천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보이고, 탁자 위에 놓인 빵과 비스킷은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데 사과를 담고 있는 바구니는 또 정면에서 똑바로 보았을 때의 모습 같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원근법의 잣대로 보면, 이 그림은 마치 공간감의 기본조차 지키지 못한 엉망진창의 실패작 같기도 하다. 도대체 세잔은 왜 캔버스 위에 이토록 어색하고 기이한 탁자를 그렸던 걸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미술사에서 오랜 시간 정석이자 기준이 되었던 '1점 투시도법(One-point Perspective)'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평면의 캔버스 위에 완벽한 공간감을 만들기 위해, 화가들은 화면 중앙에 단 하나의 '소실점(Vanishing Point)'을 찍었다. 캔버스 안의 모든 선은 오직 그 하나의 점을 향해 정교하게 배열되었다.
그러나 세잔은 이 질서를 거부했다. 풍경화, 정물화 모두 사실을 캔버스 위에 옮겨놓는 것인데 단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나란히 정돈된 세상은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잔은 고개를 돌리고, 몸을 움직이고, 이리저리 시선을 옮겨가며 대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볼 수 있었던 그 모든 시점들을 하나의 캔버스 위로 옮겼다. 단 하나의 소실점을 지워버리자 그림은 질서 정연하게 정돈된 딱딱함에서 벗어나,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사물의 본질을 비로소 보여주기 시작했다. 고정된 소실점 없이 여러 시점이 공존하는 그의 탁자는 그 자체로 이렇게 저렇게 세상을 여러 시점에서 관찰하며 탐구한 기록이기도 했다.
우리의 삶 역시 은연중에 이 1점 투시의 그림과 같아야 한다는, 대체 언제, 누구로부터 배워서 내 삶의 기준점 자리에 올려놓았던 건지도 알 수 없는 사실을 원칙 삼아 살아왔던 건 아닌가 하는 물음표가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온다.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부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성공이나 안정이라는 단 하나의 소실점을 캔버스 가운데 찍어두고, 내 모든 시간과 궤적이 그 점을 향해 최단 거리의 직선으로 정렬되어야만 의미가 있다고 여겼던 것 같기도 하다.
세잔의 작품에는 단 하나의 소실점 대신, 여러 개의 시점이 존재한다. 그 작품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시점들을 따라 탁자 위 과일들을 보고, 저기 멀리 우뚝 솟은 산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내 삶의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전의 것은 끝났지만 아직 새로운 것은 오지 않은 과도기적 공간과 시간, 더 쉽게 비유하자면 목적지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길고 텅 빈 복도나 비행기가 오기 전의 대합실 같은 곳들, 그리고 서커스에서 곡예사가 첫 번째 공중그네를 놓고 반대편에서 날아오는 두 번째 공중그네를 잡기 직전, 허공에 떠 있는 찰나의 순간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1점 투시가 주류인 곳에서 살아온 우리에게, 뚜렷한 소실점이 보이지 않는 이 텅 빈 중간 지대에 덩그러니 놓이는 것은 그 자체로 막막함일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기에, 무기력한 공백기 속에서 그저 무의미하게 '헤매고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세잔이 캔버스 위에서 이루어낸 시점의 해방은, 곧 개인의 생애사(Life History)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오직 단 하나의 목적지, 즉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정렬된 궤적만이 허용되는 1점 투시적 세계관은 종종 삶의 입체적인 본질을 왜곡한다. 궤도를 이탈했던 방황의 시간이나 뚜렷한 성과가 부재했던 공백기들은 삶을 망친 오류가 아니다. 단지 기존에 설정해 둔 소실점의 방향과 일치하지 않았던, 또 다른 시점(Viewpoint) 일 뿐이다.
따라서 지나온 시간들을 전개해 놓고 생애의 내러티브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는 '과연 성공을 향해 있었는가'라는 목적론적 가치 평가 잣대는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길을 잃고 텅 빈 리미널 스페이스를 서성였던 막막한 시간들까지, 어떠한 자기 검열 없이 있는 그대로 평면 위에 나열하는 관조의 작업이 선행될 때 비로소 전체적인 삶의 지형도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점만을 향해 맹목적으로 응시하며 곧장 질주할 때, 개인이 딛고 설 수 있는 세계는 그 좁은 선분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1점 투시의 잣대를 내려놓고 다각도의 시선으로 과거를 다시 응시할 때, 이야기는 달라진다. 당시에는 의미를 알지 못하고 헤맸던 과정, 어떤 것이라고 분명하고 반듯하게 정의내릴 수 없었던 방황의 시간, 무책임하다고 정리했던 공백기 모두 버려진 시간이 아니라 삶의 외연을 확장한 고유한 영토로 전환되는 것이다.
"헤맨 만큼 다 내 땅이다."
이 명제는 고정된 소실점을 지워낸 자리에 여러 시점의 경험들이 축적될 때 비로소 획득하게 되는, 넓고 단단한 자기 서사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이다. 방황이라 치부했던 무수한 시간들을 온전히 자신의 평면 위에 올려둘 수 있을 때, 개인은 비로소 좁다란 선분을 벗어나 자신만의 광활한 영토를 마주하게 된다. 단 하나의 소실점 아래 묶일 수 없어 이리저리 흩어진 무의미한 파편이 아니라, 나라는 고유한 세계를 오롯이 담아낸 한 폭의 거대한 파노라마를 비로소 누리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