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존재를 아는 것, ‘사랑’
Out of sight, out of mind.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라는 영어 속담이 있다. 연인 중 한 사람이 멀리 떠나거나, 일이 바빠 자주 못 만나면서 이별을 하게 될 때 종종 진리처럼 되뇌는. 눈에 안 보이다 보면 생각을 덜 하게 되고, 생각을 덜 하다 보면 다른 것들에 마음을 뺏기게 되니 일견 맞는 말인 듯싶다. 그런 보편적 상식에 의심을 품게 된 적이 있었다. 유재하를 추모하는 앨범에 수록된 <재하를 그리워하며>라는 트랙을 들으면서다.
내레이션: 조동진
제 생각엔 재하가 좀 아주 오랫동안 또 좀 먼 곳으로 잠시 떠나야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아 뭔가 남아 있는 사람들이 언짢아할까 봐
예쁜 노래들을 몇 곡 남겨 놓고 떠났다는 생각이 듭니다.
재하는 아마 좀 평소보다 좀 멀고 또 오래 걸리는 그런 여행 중에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아마 제 얘기가 틀림이 없을 거예요.
요절한 가수, 유재하. 지금도 비 오는 날이나 누군가 그리운 날이면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음악을 들으며 그를 느낀다. 죽어서 보이지 않게 된 후에 그는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게 되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과는 반대의 현상이다. 이런 현상을 보면 오히려 마음의 눈으로 느끼는 존재가 더 선명하고 오래도록 각인된다고 해야겠다.
이런 믿음은 해리 클레븐 감독의 <나의 엔젤>을 보면서 더 굳건해졌다. <나의 엔젤>은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녀 ‘마들렌’과 몸이 투명한 소년 ‘엔젤’의 운명적 사랑을 그린 판타지 로맨스이다. 사랑은 나를 보이고 상대를 보는 관계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는 과정인데,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은 보지 못하고, 보이지 않으면서도 절절한 사랑을 나눈다. 존재를 인식하는 데 시각에 의지하는 정도가 큰 우리에게는 그런 모습이 특별하게 다가온다. 그 새로움에서 독특한 재미를 느끼고, 시각에서 벗어나 존재를 느끼는 주인공들의 사랑법을 좇다 보면 진정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이처럼 <나의 엔젤>의 매력은 오감을 자극하는 영상과 사랑에 대한 깊이 있는 메시지에서 찾을 수 있다.
소년 ‘엔젤’은 특별하다. “넌 저들이 보이지만, 저들은 널 볼 수 없거든.”라는 엄마 루이즈의 말처럼. 투명인간인 엔젤은 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를 볼 수 없는 세상의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으므로. 오직 엄마와만 소통할 뿐이다. 엄마는 엔젤을 마음으로 느끼고, 그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으니까. 그런 엔젤의 눈에 소녀 마들렌이 들어온다. 창문 너머 이웃집에 사는 마들렌. 그녀를 바라보면서 엔젤은 관심을 갖게 된다. “내가 보여?”라는 엔젤의 질문에 “눈으로 안 보이지만 네 소리가 들리고 냄새도 나.”라고 답하는 마들렌. 엔젤은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는 마들렌이 있어서 세상에 존재하게 된다. 아마도 살아가는 이유를 느꼈을 것이다.
사랑이란 게 그렇다. 사랑은 존재감을 느끼게 한다.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여겨 주는 연인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스스로가 하찮다고 느낄 때조차 연인은 시시콜콜한 장점들을 내세우며 나의 본질을 규정하지 않는가? 성격이 착하고, 성실하고, 말을 잘하고, 대인관계가 좋고 등등의 특징들로 나는 정의되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있을 때, 세상에 존재함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마들렌은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것 이면의 가치들을 찾아 엔젤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한다. 마들렌에 의하면 엔젤은 부드러운 피부를 가지고 있고, 고유의 체취를 지니고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의미 부여의 과정에서 마들렌의 감각들이 총동원되는데, 화면을 꽉 채우는 마들렌의 표정에서 그 감각들의 작용을 읽을 수 있다. 복잡한 감각의 작용을 표현해 내는 배우의 표정 연기는 그래서 수려한 대사 이상의 묘미를 선사한다. 배우의 표정과 온몸의 움직임, 피부의 변화 등에서 인물의 감정을 읽어 내는 작업은 마들렌이 다양한 감각으로 엔젤을 느끼는 과정과 비슷하다. 관객은 마들렌의 입장이 되어 상대방을 느끼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근래 본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경험이다.
투명인간 소년과 장님 소녀의 사랑이라는 소재의 참신함이 추상적인 감각의 흐름 속에서 스러져 갈 때쯤 새로운 갈등이 제시되고 긴장감이 고조된다. 마들렌이 수술을 받고 앞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엔젤은 걱정한다. 마들렌의 눈이 보이게 되면, 자신은 안 보이는 존재가 될 테니까. 눈에 보이지 않으면 실존하지 않는 것이니까. 존재감은 사라지고 사랑을 잃게 되지 않을까 겁이 났을 것이다. 그래서 엔젤은 마들렌의 곁을 떠난다. 몇 년 뒤 시력을 회복해 집으로 돌아온 마들렌은 엔젤을 애타게 찾지만, 그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마들렌의 눈이 보이게 되면서 그들의 사랑은 현실의 궤도 속으로 진입한다. 이전에는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엔젤을 다른 감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인식하고, 그를 느끼며 소통할 수 있을까? 이러한 호기심으로 엔젤과 마들렌을 바라보면서 내심 그들의 사랑을 응원했다. 사랑에 빠질 때는 아무 조건이나 의심이 없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상대방에게서 보이지 않던 문제들을 발견하고 시들해지는 우리들과는 다르기를 바라며.
사랑에 빠지는 것을 우리는 ‘눈이 먼다.’라고 한다. 마들렌의 눈이 보이지 않는 설정은 바로 그런 비유의 상황에서 온 것이 아닐까? 엔젤이 투명인간인 설정은 보이는 것 이면의 본질을 알아채 줄 상대를 원하는 우리들의 바람이 투영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영화는, 사랑은 대상의 보이는 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본질을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면서 80분의 러닝 타임은 극장을 나온 이후 지금까지 쭉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 뒤로 흐르는 배경 음악 하나. 존 레넌의 <Love>. 가사를 음미하며 듣고 또 듣는다. 보이지 않는 가을의 피부와 체취가 한껏 살아난 감각을 통해 가득히 느껴진다.
Love is real,
real is love
Love is feeling,
feeling love
Love is wanting
to be loved.
Love is touch,
touch is love
Love is reaching,
reaching love
Love is asking
to be loved
Love is you
You and me
Love is knowing
We can be
Love is free,
free is love
Love is living,
living love
Love is needing
to be loved.
사랑은 진실(한 것)
진실(한 것)은 사랑
사랑은 느끼는 것
느끼는 사랑
사랑은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
사랑은 어루만지는 것
어루만지는 것은 사랑
사랑은 손 내미는 것
곁에 있는 것은 사랑
사랑은 사랑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
사랑은 당신
당신과 나
서로의 존재를 아는 것
사랑은 자유로운 것
자유로움은 바로 사랑
사랑은 산다는 것
살아 있는 사랑
사랑은 사랑받길
필요로 하는 것
-John Lennon, <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