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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간도>의 재회, ‘그들만의 잔치’

장문강, <골드핑거>

by 박재우

최근 MBC 예능 <놀면 뭐하니?>에서는 ‘80s 서울가요제’라는 기획을 선보였다. 1980년대 큰 인기를 끌었던 가요제 포맷을 빌려와 그 시절을 풍미했던 연예인과 현재 인기 있는 가수들이 당시의 노래로 경연을 펼치는 구성이었다.


기획 의도는 명확했다. 중장년층에게는 향수를, 젊은 층에게는 뉴트로의 재미를 선사해 화제성을 잡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전략은 숫자로 증명됐다. 방송은 2025년 <놀면 뭐하니?>의 자체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 높은 시청률과는 별개로 나의 개인적인 감상은 씁쓸했다. 방송은 대중의 공감을 얻기보다 값비싼 무대 장치 앞에서 유명인들이 그들끼리 옛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는 ‘노래방 뒤풀이’처럼 보였다. 그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이 나에게는 유독 공허하게 다가왔다.


장문강 감독의 <골드핑거>를 보며 느낀 감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골드핑거>는 그 시작부터 거대한 이벤트였다. 2002년 <무간도>라는 홍콩 누아르의 마지막 신화를 썼던 각본가 장문강과 두 주연 배우, 양조위와 유덕화가 20여 년 만에 재회했다. 여기에 홍콩 영화 사상 최고액인 3억 5천만 홍콩 달러(한화 약 594억 원)의 제작비를 투입해 1980년대 홍콩의 가장 화려했던 시절을 블록버스터 수준으로 재현했다.


이 모든 요소는 ‘홍콩 영화의 화려한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처럼 보였다. 관객은 20년 전, 서로에게 총을 겨누던 두 남자의 엇갈린 운명과 그 지독한 비극이 주었던 가슴 저린 여운을 다시 한번 기대했다.


하지만 정작 영화가 선사하는 경험은 우리가 열광했던 홍콩 누아르의 심장과는 거리가 멀다. <무간도>가 선사했던 짙은 페이소스와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비극의 미학, 그 어떤 것도 <골드핑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15년에 걸친 집요한 추적 끝에 결국 나쁜 놈이 법의 심판을 받는다는, 지극히 교훈적이고 예측 가능한 권선징악의 메시지만이 남는다. <무간도>의 마지막,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해진 옥상 위에서 ‘나’를 증명해야 했던 남자의 고뇌는 사라지고, ‘정의는 승리한다’는 교과서 같은 결말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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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영화가 기획 단계부터 홍콩 내수 시장이 아닌 거대한 중국 본토 시장을 겨냥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골드핑거>의 전 세계 흥행 수익 약 8,560만 달러 중 절대다수인 약 7,970만 달러가 중국 본토에서 나왔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이 교훈적 서사는 본토의 엄격한 검열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한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안전함의 대가로 홍콩 누아르 특유의 위험하고 매혹적인 장르적 쾌감을 스스로 거세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안전한 결말을 미리 정해둔 영화는 자연스럽게 사건의 내면을 깊게 ‘들여다보기’보다 현상을 그저 ‘훑어보기’로 일관한다. 현상의 배후에 숨겨진 음모나 심리를 파고들지 않으니 관객은 이 공백을 채우기 위해 자신이 기존에 봤던 다른 금융 범죄 영화들(<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같은)을 떠올리며 스스로 추론해야 한다. <골드핑거>가 여러 영화의 장면들을 얄팍하게 차용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유덕화가 연기한 수사관 ‘류치위안’의 묘사가 대표적이다. 영화는 그가 15년에 걸쳐 양조위의 ‘청이옌’을 추적했다는 ‘시간의 경과’는 보여주지만, 그를 단죄하기 위한 집요한 ‘투쟁의 과정’은 생략한다. 류치위안의 치열함은 관객의 추론 영역으로 남겨진 채 영화는 그저 표면적인 성과만을 전시할 뿐이다.


결국 관객에게 남는 것은 서사적 공감이 아닌, 80년대 홍콩의 이미지를 3억 5천만 홍콩 달러로 복원한 ‘화려한 겉모습’뿐이다. 물론 이 화려함 그 자체를 폄하할 수는 없다. <골드핑거>는 제42회 홍콩 금상장 영화제에서 촬영상, 미술상, 의상/메이크업상, 시각효과상 등 6관왕을 차지하며 그 기술적 성취를 분명히 공인받았다. 이는 그 자체로 홍콩 영화 프로덕션 디자인이 이룬 하나의 정점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완벽하게 복원된 이미지는 기술적 성취에 머물 뿐 서사의 공백을 메워주지는 못한다. ‘박물관의 박제’처럼 생동감과 심장박동은 느껴지지 않는다.


당대의 아이콘인 유덕화와 양조위를 20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시킨 전략은 만족감보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무간도>의 스타를 소환한 것은 거대 자본을 유치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타협’이었을지도 모른다. 양조위와 유덕화라는 이름값 없이는 이 정도 규모의 블록버스터는 기획조차 불가능한 것이 홍콩 영화계의 현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두 배우의 재회는 20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새로운 화학작용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을 재소비하는 데 그친다.


<무간도>의 구도를 뒤집어 양조위가 악역을, 유덕화가 선역을 맡는 시도조차 느리고 안전한 ‘권선징악’의 플롯 속에서 그 빛을 잃는다. 마치 두터운 특수 분장으로 매끈하게 처리된 두 배우의 얼굴처럼 모든 것이 화려하고 번지르르 하지만 어딘가 인위적이고 공허하다.


<골드핑거>는 <놀면 뭐하니?>의 ‘80s 서울가요제’ 프로젝트처럼 결국 ‘그들만의 잔치’가 되어버렸다. 홍콩 금상장에서 양조위가 6번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을 때, 많은 이들이 그 결과에 온전히 공감하지 못한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시상식 당일, 양조위의 아내 유가령은 “많은 사람이 또 그가 상을 받느냐고 하겠지만, 그는 정말 훌륭한 배우”라고 남편을 변호해야 했다.


이 수상 결과는 <골드핑거>의 현주소를 명확히 보여준다. 영화는 최고의 기술상과 최고의 배우상은 가졌지만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은 모두 놓쳤다.


화려한 파티였고, 최고의 스타가 무대에 섰다. 하지만 정작 그 파티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관객의 가슴을 뛰게 할 ‘이야기’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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