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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림 Apr 11. 2020

그릇에 담긴 진심

따뜻한 음식이 담기기 전에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일본에서 자취를 시작하고 처음 몇 달간은 혼자 요리를 해먹는 데에 빠져, 쟁반 위를 어떻게 채울까 고민하기 바빴다. 외국어로 듣는 수업에 적응하느라 집에 돌아오면 쓰러져 잠들기 일쑤였지만, 집에 걸어 돌아오면서만큼은 과제 걱정도 차치하고 무얼 사다가 어떻게 조리해 먹을지 고민하는 데에 집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것이 늦깎이 학생으로 다시 돌아온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다독거림' 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잠깐 과거의 이야기를 조금 풀어놓자면, 나는 미대를 졸업하고 문화예술 분야, 그 중에서도 도시문화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했다. 아직 형태가 없는 어떠한 것에 대해 내가 두루뭉술하게 설명하면, 그것을 가시화 시켜주는 천재같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 익숙했던 나는, '아마도 나도 할 수 있을 거'라고 함부로 생각했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무형의 것을 심지어 스스로 구현까지 해낼 수 있다면 최강이 되는 게 아닐까하고. 그렇게 다시 공부의 길로 접어들었다. 물론 도시문화콘텐츠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전공은 아니었으며, 심지어 국내 대학원도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일본의 한 미대의 텍스타일디자인 전공으로 진학했다.



일본에 와서 전공에 대한 지식도, 타지에서 마음을 나눌 친구도 없다시피한 내가, '자신감 없음'과 '두려움'에서 빠져나와 '다독거려줄 사람'은 오로지 나뿐임을 이 작은 집에서 매일 읊조렸다. 그러니 스스로에게 밥이라도 잘 해 먹이자고, 건강해지자고. 그렇게 1년, 2년이 지나니 점점 많은 요리를 해낼 수 있는 내가 되었고 언제나 주방에서는 따뜻한 온기가 돌았다.


그리고 그 온기와 함께 어느덧 거주 만 2년을 꽉 채운 이 작은 집을 더욱 따끈하게 덥혀주는 친구들도 하나 둘 늘어났다. 애틋하고 소중한 한국 친구들, 이제는 동네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내 소중한 학교 친구들이 우리집에 들러 야금야금 한솥밥을 먹고 간다. 한솥밥을 먹는다는 건 그 솥에 잔뜩 서로의 이야기를 집어넣는 것. 그것이 농익으면 대화는 다음으로 다음으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굳이 이야기를 이끌어내려고 하지 않아도 쏟아진다. 맛있는 음식은 아마도 그 자리에 놓이는 그냥 안주 같은 것일 게다. 먹기 위해 만나는 게 아니라, 우리는 시간을 나누기 위해 만난다고 나는 믿는다.


어떤 날은 샤브샤브, 또 다른 날은 파스타
추운 날엔 스키야키, 생일날엔 한식 그리고 미역국








친구들이 오기 전, 어떤 메뉴를 낼 지 고민하고 그에 맞춰 장을 본다. 필요하다면 레시피를 손으로 적어 주방에 붙여둔다. 전날부터 몇번이고 시뮬레이션을 하고 계획에 맞춰 서둘러 움직인다. 어떤 식기를 사용할지 고민하고 필요하다면 구입도 마다않는다. 나는 맥시멀리스트니까. 식탁 위에 어떻게 배치할지 그림으로 그려보기도 하고, 당일에는 그 그림을 봐가면서 미리 식탁에 빈 그릇을 올려 둔다.



나는 빈 그릇이 놓인 그 식탁을 바라보는 일이 좋다. 조리를 시작하기 전, 이 빈 그릇을 지긋이 바라본다. 그리고 이 그릇 위에 차츰차츰 쌓일 것들을 상상할 수 있어 웃음이 난다. 우리는 단지 먹기 위해 만나는 게 아니니까. 우리가 여기에 담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진심이니까. 서로를 향한 진심, 그리고 서로를 향한 사랑. 그걸 쌓는 시간이 식사시간이 아닐까. 나를 다독여주던 혼자만의 식탁은, 이제는 하나 둘, 여럿, 모두를 위한 식탁이 되어주었다. 오늘도 나는 빈 그릇을 올려두고 그 안에 뭉근하게 끓여낸 진심을 담는다. 그리고 당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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