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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완 Feb 20. 2024

2. 청년내일채움공제 ①

“지완씨 너무 약해요. 좀 더 강해지세요.”

내가 처음으로 받은 경제 교육은 <열두 살에 부자가 된 키라>라는 책이었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3, 4학년이 됐을 무렵 일주일에 한 번씩 용돈을 주기 시작했다. 용돈기입장도 당연히 쓰게 했고, 매주 그것을 검사했다. 그런데 나는 정말 기입만 하는 어린이였다. 어차피 일주일이 지나면 엄마가 다시 용돈을 줄 거고,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놀러 다녔다. 


나중에 성인이 되고 나서 엄마가 한 말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네 동생은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용돈을 모아서 그걸 샀는데, 너는 용돈 받은 날이면 너 갖고 싶은 거 그냥 사갖고 들어오는 애였어. 그것도 자질구레하고 반짝반짝한 것들만.” 결론적으로 나의 엉망진창이 된 경제 관념은 어렸을 때부터 싹이 보였다는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어느 정도 스스로의 자본이 생겼을 때쯤 문득 두렵기도 했다. 나는 앞으로 큰 돈은 못 벌 것 같고, 심지어 투자 같은 것도 전혀 못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스스로 뻔뻔하게 믿는 구석이 있었다. 나는 갖고 싶은 게 있거나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어떻게든 돈을 모아서 그것을 이뤄내는 힘은 있었다. 중학생 때 밴드부를 한 번 만들어 보고 싶어서 용돈을 악착같이 모아서 일렉 기타를 한 대 사기도 했고, 대학생 땐 정말 꼭 유럽여행을 가고 싶어서 휴학을 하고 6개월간 일만 해서 한 달의 유럽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어떻게든 할 것이라고, 나는 나를 믿었다.



      

‘청년내일채움공제’(이하 내채공)는 정부의 청년 지원 정책 중 하나였다. 만 34세 이하의 청년이 2년이나 3년 정도의 기간동안 성실하게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면, 국가와 기업이 청년에게 목돈을 만들어주는 제도였다. 포털사이트에 찾아보니 ‘중소기업 인력 미스매치를 해소하고, 노동시장 신규 진입 청년의 초기경력 형성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청년ㆍ기업ㆍ정부 3자가 공동으로 적립한다’라는 설명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중소기업에서 청년이 2년 동안 400만 원을 저금하면 국가에서 중소기업의 몫까지 부담해 800만 원 주고, 2년 뒤에서는 청년에게 1,200만 원을 만들어주는 그런 제도였다.


이 제도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청년의 연봉이 몇천만 원 이하여야 하고, 최소한으로 충족돼야 하는 중소기업의 규모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일하는 ‘신문, 잡지 및 정기 간행물 출판업’같은 미디어나 출판 관련 분야는 5인 미만의 사업장이어도 내채공에 가입할 수 있었다. 그게 내 두려웠던 5개월과 심란한 2년 7개월의 잘못 꿰인 첫 단추였다. 




내가 내채공이라는 제도를 처음 알게 된 2018년쯤엔 오백만 원에서 천만 원 정도의 보증금만 있으면 10평대의 방 2개 정도가 있는 오피스텔을 구할 수 있었다. 지역에 따라서 가격은 천차만별이었지만, 적어도 우리 동네는 그랬다. 2017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언젠가 멋진 작가가 될 것이라고 꿈꾸면서 딱 2년만 회사에서 눈코입을 막고 버텨보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2년 뒤에 천만 원을 타서, 내 작업실을 만들겠다고 아주 희망찬 꿈을 꿨다. 사람이 눈코입을 다 막으면 버틸 수 있는 게 아니라 죽는다는 걸 몰랐다.


내채공은 청년이 입사하고 6개월 이내에 가입할 수 있었고, 가입 후에는 1, 2개월 안에 취소할 수 있는 기간이 있었다. 2개월 후에는 취소를 할 수 없고, 해지해야 했는데, 해지 이후에는 다시 내채공을 가입할 수 없었다. 내채공은 청년의 인생에 딱 한 번 주는 기회였다.


내가 2018년도에 입사했던 종로구에 있던 작은 경제 신문사는 내채공이라는 제도를 아예 모르고 있었다. 내가 3개월이라는 수습 기간을 보냈을 무렵, 그쯤 들어온 34세의 어른 신입이 회사에 내채공을 알렸다. 나는 제도는 알고 있었지만, 섣불리 내채공을 가입해달라고 했다가 수습 기간에 잘리는 게 아닌가 조마조마하고 있을 때였다. 그 정도로 내게 사회는 무서운 곳이었다. 어른 신입의 도움으로 나는 입사 4개월 차에 내채공에 가입할 수 있었다. 내채공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회사 측에서 마련해줘야 하는 서류들도 있었다. 회사 규모가 작은 편이어서 경비처리를 하고 사무를 보는 직원은 단 한 명이었다. 심지어 오랫동안 아이를 기다렸던 임신 초기의 여성분이어서, 나는 내가 기관에 전화를 하고 발로 뛰면서 필요한 서류를 찾았고 요청했고 부탁했다. 회사에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제도였기 때문에 바쁘고 갈급했던 건 나였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을 해서 내채공을 들었는데, 되레 버티지 못한 것은 나였다. 중소기업 중에서도 소기업에 속했던 그 회사는 신입을 키울 여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신문방송학과 출신이 아니었던 내가 ‘기사문’을 쓰는 것은 능히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또한, 손에 쥐고 있는 돈이 있으면 다 쓰고 돌아오는 내가 투자의 가장 최상급 레벨이라고 할 수 있는 ‘주식’을 얘기한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게 무모한 일이었다. 물론 2주의 신입 교육을 거치긴 했지만, 그것은 젓가락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젓가락을 쥐는 법으로 젓가락을 쥐어보기만 했던 시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글을 쓰는 있는 능력은 있었기에 작문 면접을 통과할 수 있었고, 회사에서도 글은 쓰니까 나머지는 본인이 부딪히면서 배워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부딪히고 상처 입는 것에 매우 큰 데미지를 입고 말았다. 기업들의 보도자료, 정부의 보도자료 등을 처리하던 내게 어느 날 선배는 우리나라 유통 3사의 마트 자료를 주면서 어떤 회사가 앞으로의 글로벌 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낼 것인지 찾아오라는 과제를 내줬다. 영업이익을 계산하고 어떤 회사가 더 많은 부채를 가지고 있는지, 가장 먼저 순이익을 뱉어낼 회사가 어디인지, 그런 사전 공부를 했고 (지금은 정말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계산식을 가지고 엑셀을 두들겨서 과제를 해내고자 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일단 각 회사가 진출한 국가가 다르기에 다뤄야 하는 지표들이 너무나 방대했다. 회사의 운영 방향들도 달랐고, 애초에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이 유통이 먹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이게 뭔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금토일 밤낮을 고민하다가 월요일에 선배에게 보고를 했다. 모르겠다고, 답이 없다고. 그때 선배는 답했다. “맞아, 그거 답 없어, 애초에 비교할 수 있는 회사들이 아니거든. 수고했어.”라고. 그 대답을 듣고 나는 너무 서러워서 화장실에 가서 엉엉 울었다. 너무 화가 나서 퇴근 후엔 34세의 어른 신입에게 맥주를 마시고 하소연을 했다. 그리고 그때 어른 신입은 나에게 또 한 번의 어퍼컷을 날렸다. 


“지완씨, 회사는 원래 그래요. 뺑이 쳐봐야, 자기가 하는 일이 뭔지를 알죠. 그렇게 배우는 거예요.”

맥주가 들어가서 알딸딸하고, 오후 내내 회사에서 훌쩍거리느라 부은 눈을 끔뻑이면서 나는 물었다.

“왜 뺑이 쳐야 해요? 나는 주말 내내 얼마나 무서웠는데, 내가 놓친 게 있고, 회사 교육을 잘못들은 게 아닐까 그렇게 두렵게 떨었는데, 그걸 왜 해야 해요?”

“뺑이를 치면서 지완씨 자료 열심히 봤죠? 계산 열심히 했죠? 그렇게 익히는 거예요.”

“왜요?”

“왜라뇨, 많이 해 봐야죠!”

“답이 있는 걸로 하면 안 돼요? 신입이 할 수 있을 만할 걸로 하면 안 돼요?”

“지완씨 여기 학교 아니예요. 이익을 내야죠.”

“뺑이 치는 건 이익이 나오나요?”

“지완씨 너무 약해요. 좀 더 강해지세요.”   

  



나는 굉장히 약한 신입이었다. 산업부 기자 특성상 각 기업의 쟁쟁한 홍보팀들과 하루에도 두 번씩 티타임을 가지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날이 선 대화를 나눴다. 나와 나이가 띠동갑은 차이가 날 것 같은 홍보팀장이 “이 기자님, 이 기자님”하면서 나에게 사람 좋은 미소를 보였다. 분명 좋은 사람 같아 보이는 데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너무 무서웠다.


눈물이 자주 나서, 화장실로 잘 도망쳤다. 업무 특성상 기자는 현장에 나가서 단독으로 움직였는데, 한 번은 기자실에 혼자 앉아있다가 메신저로 지시하는 선배가 너무 무서워서, 노트북을 가지고 비상구에 가서 엉엉 울면서 기사를 썼다. 다른 매체 기자들도 다 같이 앉아있는 기자실에서 엉엉 울 순 없었다. 울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너무 바보같고 무가치한 인간 같아서 울었다. 한 번은 부장 기자가 내게 “0.5인분을 하는 기자를 견딜 수 있는 것은 한 달이다, 그런데 나는 너를 2개월을 기다렸다”라는 얘기를 했다. 너무 죄송해서 부끄럽고, 당장이라도 부서져서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내가 지구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민폐라고 생각했다. 아주 심각한 마음의 병이 들고 만 것이었다.


아직도 나는 2018년 8월의 마지막 주를 잊지 못한다. 그해 8월은 아주 꽉 찬 한 달이었다. 8월 31일이 금요일이었다. 그해에는 비도 참 많이 왔다. 27일 월요일인가, 28일 화요일인가, 비가 엄청 많이 오는 날, 그날도 어김없이 비상구에 앉아있다가 문득 계단 난간 너머를 봤다. 명동에 있는 기자실이었고, 13층이었을 것이다. 무엇에 홀린 듯이 계단 난간 너머로 상반신을 쭉 넘겨보았다. 여기서 떨어지면 아주 편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정말 하염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나만의 작은 작업실을 갖고 싶었다. 다시 행복해지고 싶었다. 다음 날 사무실로 들어가 사직서를 냈다. 8월 31일까지 근무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얼른 내채공을 떠올렸다. 내가 다시 눈코입을 막고 다시 버틴다면 벌 수 있을지도 모르는 ‘천만 원’. 내채공에 가입하고 1, 2개월 내에는 취소할 수 있다고 했다. 몇 번씩 담당 기관에 전화를 걸어서, 내가 취소가 가능한지, 내가 나중에, 정말 나중에 죽지 않고 살아서 만 34세가 되기 전 다시 한번 중소기업에 들어간다면 내채공을 가입할 수 있는지 물었다. ‘죽지 않고 살아서’라는 말은 마음속으로만 했다.

나의 내채공을 담당해주던 고용노동부의 하청 센터는 ‘종로여성인력개발센터’라는 곳이었다. 그곳에 있는 상담원은 몇 번이고 물어보는 내게 언제나 차분하게 답해줬다. 


“네, 선생님. 선생님은 가입한 지 2개월이 지나지 않아서 취소처리가 돼요. 나중에 가입하고 싶으면 다시 할 수 있어요.” 


참 고마운 목소리였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내채공은 ‘취소’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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