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떠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8년 8월에 퇴사하고 나는 일종의 히키코모리처럼 시간을 보냈다.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은 2019년 2월이었다. 그리고 또 1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또 1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2020년 연말에는 우리 인류에게 엄청난 재앙이 닥치기도 했다. 팬데믹을 겪고, 그 와중에 나는 안 좋은 정신건강을 부여잡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두 번째 내채공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우연이었다. 히키코모리의 시간을 지나고, 자주 가던 동네서점에서 1년 정도 일해보고, 또 풍파를 맞았다가, 동네 보습학원에서 보조 강사로 있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학원 사정이 여유롭지 않아 졌다. 사회와 떨어져 지낸 지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2년 전보다 나의 마음 상태도 나아졌다.
그때 나는 청년예술인들을 위한 국가의 지원제도에 참 많은 관심이 있었는데, 어떤 지원사업을 신청하기 위해선 ‘워크넷’이라는 고용노동부 산하 구직 사이트에 이력서를 공개해둬야 하는 요건이 있었다.
어차피 아르바이트로 근무하던 학원도 상황이 좋지 않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자각은 있던 때였다. 그래서 ‘될 대로 돼라, 어떤 일이 내게 불어닥쳐도 난 이제 그냥 받아들이고 걸어 나가련다.’라는 마음으로 이력서를 공개해 뒀다. 지원사업에 뽑혀서, 작품을 할 수 있거나 어디든 계약직 사무원이 되면 또 어떻게 1년, 2년은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예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경제신문사를 들어가기 전 나의 또 다른 꿈은 영화부 기자가 되는 일이었다. 실제로 학부시절에 영화과 수업을 듣기도 했고, 내 세계에 있어서 영화란 여분의 산소통 같은 것이었다. 숨 쉴 수 없을 것 같은 세상에서 영화를 볼 때만큼은 난 참 행복했다. 하지만 영화부 기자가 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에 대한 믿음도 부족했다. 그냥 되는 대로 어리바리 살아온 내가 영화에 관한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영화는 나보다 좀 더 똑똑한 사람이 얘기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소비 정도만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그냥 나를 받아줄 만한 작은 신문사에 이력서를 내고 취직했다.
기자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는 메이저급 신문사에 들어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중에 문화부로 간다는 것은 얼마나 더 힘든 일인지를 알게 됐다. 한 선배는 문화부에선 돈 나올 구석이 없어서 매체나 지면이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문화부가 있어도 연차 높은 선배들이 놀러 가는 부서라고 말했다. 어리고 어렸던 나는 선배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점점 더 문화부와 멀어졌다. 그런데 내게 아주 이상한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문화 전문 매체에서 면접 제의가 왔다.
그 문화 전문 매체는 온라인 기사와 지면 신문을 발행하고 있었고, 미술부 기자를 뽑는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이게 무슨 횡재인가’라며 박수쳤다. 문학, 영화 다음으로 내가 즐기는 것은 미술 전시였다. 그림을 보면서 그 안의 이야기를 상상해 보는 건 내 조용한 취미였고, 작품 하나를 보기 위해 역사와 철학을 어느 정도 즐겨야 한다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당시 나는 나에 대한 믿음도 부족하고 자신감도 정말 많이 떨어져 있었다. 면접 제의가 왔지만, 당연히 합격할 순 없을 것이라 믿었다. 서류상에 적힌 나는 내가 아니며, 나는 한 명의 사회인으로도, 나아가 한 명의 기자로는 더더욱 살아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나를 사회로 밀었던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지역가입자가 된 나의 건강보험료와 두 번째는 학원 통로에 마련돼 있던 내 자리였다.
아버지가 퇴직 후에 잠시 다니시던 직장마저 그만두게 되면서,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부양가족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평생을 직장인으로 살아오신 아버지는 ‘지역가입자’라는 것을 잘 모르셨고, 그것은 우리 가족 모두가 동일했다. 그 시기 동생은 평생을 짝을 찾아서 집을 떠났고, 성인이 돼서 결혼도 하지 않은 나는 낙동강 오리알처럼 아주 선명하게 세상에 등장하고 말았다. 동시에 대한민국에서 한 명의 성인으로써 살아가는 요금이 어느 정도인지도 아주 뼈저리게 알게 됐다. 집안에 이러저러한 폭풍이 지나가고 나는 꿈이 생겼다. 어떤 일이라도 좋으니 사대보험을 들어주는 곳으로 일자리를 찾아야겠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요인은 아주 현실적이고 금전적인 지점이었지만, 두 번째 요인은 죽은 나무에 피어난 아주 작은 새싹과도 같은 것이었다. 사실 1년여 정도 일한 보조 강사의 경험은 내게 아주 큰 응원이 돼줬다. 원래 나는 아이들과 상성이 좋은 사람이었는데, 아이들의 나머지 공부를 도와주는 과정 속에서 보람을 느끼고 자신감을 채울 수 있었다. 가끔은 정규반에서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내가 도맡아 수업해주기도 했다.
학원에서 나의 공식적인 업무는 아이들의 단어 노트를 제본하는 것, 프린트물로 교재를 만드는 것 정도였지만 어느 순간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고, 아이들과 시간을 함께하고 있었다. 1년여의 시간 동안 나는 아이들과 많이 친해졌고, 아이들은 학원 복도 한편에 마련된 내 책상으로 찾아와 익숙하게 나를 부르곤 했다.
학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주말에 가족과 어떤 곳을 갔는지, 수학 학원을 왜 가기 싫은 지, 초등학교 3학
년에서 5학년 사이의 아이들이 재잘재잘 떠들었다. 중ㆍ고등학생 친구들을 가끔 만나는 때도 있었는데, 그 친구들과는 지금 어떤 웹툰이 재밌는지, 학원 수업 시간마다 맨날 자는 아이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 속속들이 내게 알려주곤 했다. 그렇게 나머지 공부를 하면서 하염없이 나와 떠들고 나면 다시 아이들은 자기들의 반으로 돌아갔다.
정규 수업이 시작되고 나면 나는 먼지 냄새가 나는 복도 한편에 앉아서, 제본기로 종이에 구멍을 뚫고 스프링을 끼웠다. 여유 시간이 생기면, 수능 영어단어장을 뒤적이면서 내가 아는 단어와 모르는 단어를 구분해보기도 했다. 아이들이 좋았지만, 외롭기도 했다. 나도 저 아이들의 정규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의 본 직업은 강사가 아니었다. 그때마다 눈앞의 복도가 끝도 없이 늘어지는 것 같았다.
내가 보조 강사 일을 할 시기에, 팬데믹이 전 세계를 뒤덮었다. 휴교하는 날이 많았고, 아이들은 학기와 방학이 구분되지 않는 시간을 보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아이들은 학교를 갓 입학한 1학년, 2학년 친구들이었다. 계절은 돌고 돌아 팬데믹 속에서도 신학기는 시작됐다. 학원의 신학기는 조금 더 일렀다. 초등학교 3학년이 우리 학원에서 가장 어린 친구들이었는데, 12월쯤부터 예비 초3 학생반이 학원에 만들어졌다. 11명 정도의 아이들이었는데, 초등학생 티가 나는 아이도 있었지만 그냥 유치원생 같은 아이들도 있었다. 그중엔 소심하고 낯을 많이 가리는 여자아이도 있었다. 체구도 작아서 아이들이 작은 몸싸움을 일으키는 숙제 검사 줄 서기에서도 꼴찌를 담당했다. 조금 더 안타까웠던 건 아이가 알파벳 읽기에서도 다른 아이들보다 뒤처진다는 것이었다.
예비 초3 학생들의 수업은 정규 수업 20분, 놀이 수업과 같은 영어책 읽기 수업 20분으로 구성돼 있었다. 나는 보조 강사로 영어책 읽기 수업을 도와줬다. 각반마다 뒤처지는 아이는 언제나 있었기에, 나는 정규 선생님이 챙겨주지 못하는 아이들을 챙기면서 응원하고 도와주는 역할을 하곤 했다. 잘하는 것이 중요한 때가 아니라, 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시기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고, 수업은 점점 심화돼 가는데 예비 초3 반의 그 아이는 점점 더 수업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일이 벌어졌다. 영어책 읽기 수업을 마치고 정규 수업을 들으러 강의실을 이동해야 하는데 아이가 갑자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원래 곧잘 울던 친구였기에 조금 달래주면 수업을 들으러 갈 것이라고 봤다. 그런데 그날의 울음은 달랐다. 아이는 가방 안에 책도 집어넣지 않으려 했고, 필통 안에 연필을 넣으려 하면 소리를 지르면서 울었다. 아이는 계속해서 영어책 읽기 강의실에 남아있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학원에서 나의 표면상 직책인 ‘실장’이라는 명칭을 말하면서, 실장 선생님이랑 이곳에 있겠다고 말했다. 결국 그날 아이는 정규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고, 대신 나와 함께 정규 수업 교재를 함께 풀었다. 형언할 수 없는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학원에서 일하면서 내가 깨달은 하나는 아이들은 정말 잘 잊고, 빨리 큰다는 것이었다. 그 소동을 피웠던 아이는 몇 주간 더 고생하긴 했지만, 같은 반 여자아이들과 친해지면서 반에 적응할 수 있게 됐다. 아이는 더 이상 실장 선생님을 찾지 않았다. 그즈음 문득 복도 한편에 마련된 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면접 제의가 왔던 것이었다. 이젠 떠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당장 떠나지 못한다 해도 이제 복도 말고 사무실이나 강의실 안에 있는 책상을 갖기 위해 걸어 나가야 한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