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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작가 Dec 20. 2020

첫 번째 이야기. 저는 어렸을 때부터. -2-

31살 신입사원이 되기까지... 수능.

 2005년 9월. 이전까지 내게 'SKY'는 뜬 구름과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9월 전국연합학력평가를 통해 'SKY'가 비로소 내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누구나 한 번씩 겪는다는 슬럼프가 나를 찾아왔다. 지금껏 받아보지 성적에 들떠서였는지는 몰라도 이후에 치르는 시험마다 조금씩 점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10대에서 가장 중요한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도 나는 여전히 슬럼프에 빠져있었다. 흔히 운동선수들이 슬럼프에 빠졌을 때 하는 것처럼 이전보다 더 공부를 더 해보기도. 아니면, 조금은 공부를 덜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노력에도 떨어진 점수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니는 이제 내 라이벌 안 되겠다."

"...?"


 그런 나를 보며, 나와 점수대가 비슷했던 한 친구가 내게 말을 건넸다. 이제는 자기 라이벌이 아니라는 말에 나는 뭔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말을 들은 다음부터 떨어지기만 하던 점수가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전히 2005년 9월의 점수까지는 갈 길이 멀었다. 작년의 점수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학창 시절의 마지막 시험이 날 찾아왔다.




 2006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 살면서 처음으로 맞이한 긴장에 나는 밤새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했다. 밤새 침대에 누워 뒤척이다 저 멀리 운동장에서 태권도부의 새벽 운동 소리에 겨우 몸을 일으켰다. 평소라면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끄럽던 기숙사도 이 날 만큼은 고요했다.  각자 배정받은 고사장으로 떠나기 전. 서로 수능을 잘 보라는 간단한 인사와 함께 부모님의 차를 타고 시험장으로 떠났다. 뒷좌석에 앉은 나는 처음으로 세상 만물의 신들에게 몰래 기도하기 시작했다.


'오늘만큼은 모든 운이 절 도와주세요. 오늘 찍은 문제들이 다 맞게 해 주세요.'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배정받았기에 시험장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부모님이 준비하신 엿과 찹쌀떡을 입에 머금고 부모님의 배웅을 뒤로한 채 시험장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같은 교실에 배정받은 친구와 나란히 앞뒤로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긴장을 풀어보려고 했지만 이 시험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생각에 쉬이 풀어지지 않았다. 감독관이 교실에 들어서고, 방송에 따라 2007학년도 수능이. 9시간의 시험이 시작되었다.


"오늘 수학 좀 쉽던데."

"진짜? 니도 쉬웠나?"

"아니 내도 어려웠다."


 중간에 허락된 1시간의 휴식시간. 점심을 먹기 위해 같은 학교 애들끼리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러 곳에서. 그리고 학교 선생님들이 점심시간에 수능에 대한 얘기를 하지 말라고 했지만 우리의 이야기 주제는 수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검산할 여유도 없을 만큼 겨우 시간 내에 마무리했던 수리영역이 다른 친구들은 쉽게 느껴졌다는 말이. 시험을 치르는 동안 겨우 진정되었던 내 마음이 다시 동요하게 만들었다. 같은 교실에 배정받은 친구와 나. 둘만이 어렵게 느꼈을 뿐. 나머지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먹었고, 어쩌면 이 날 시험이 벌써 망했을 것 같다는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짧은 점심시간이 지나고 맞이한 외국어영역. 시험에 집중하는 동안 동요된 마음이 다시 진정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사회탐구영역 시간. 받아 든 시험지를 하나하나 넘어갈 때마다 진정되었던 마음은 이리저리 요동치기 시작했다. 평소 모의고사보다 훨씬 더 어려워진 사탐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덕분에 마지막 제2외국어영역은 답안지를 한 줄로 줄 세워놓은 채.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며 이 9시간의 시험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딩~동~댕~동"


 기다렸던 종소리. 이 종소리를 끝으로 지난 학창 시절의 노력이 모두 끝이 났다. 단 하루. 아니 9시간 만에 지난 학창 시절이 모두 끝이 났다는 생각에 허무한 마음이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때문에 시험장을 나서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내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수능을 잘 보지 못했다는 마음에 더 그랬던 것도 있었다. 그렇게 부모님이 기다리고 있을 교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그곳에 오늘 하루 종일 소중한 아들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던 부모님의 얼굴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 고생했다. 저녁 맛있는 거 먹으러 가야지. 뭐 먹고 싶노?"


 고생했다는 부모님의 말. 그 말이 겨우 붙잡고 있던 것들을 와르르 무너져 내리게 했다. 지금까지 시험 때문에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나였지만 이 날은 아니었다. 뒷좌석에 앉아 허탈한 마음을 비우듯이 큰 소리로 눈물을 쏟아 보내기 시작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들의 모습에 부모님도 당황했고, 시험장 주차장. 차 뒷좌석에서 한참을 눈물을 보내고 나서야 시험이 끝나고 나를 무겁게 눌렀던 그 기분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수능이 끝난 후, 엄격한 규칙 속에서만 생활해야 했던 기숙사에도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오전 수업이 끝난 후에는 저녁 점호 전까지 외출을 해도 상관이 없었고, 핸드폰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 외출을 하지 않은 날에는 기숙사 방 안에서 만화책을 보거나, 전산실에 가서 컴퓨터를 하며 그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들과 마음껏 연락을 하며, 수능날. 그 날의 감정에서 점차 빠져나왔다. 그렇게 한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고, 20살의 시작을 어디서 할지 선택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여러 학원에서 발표한 배치표를 기준으로 내가 갈 수 있는 대학교를 찾아보기 시작했고,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통해 최종으로 3군데 학교에 원서를 접수했다. 그리고 20살이 된 나는 3년 동안 못 본 중학교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서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과는 2군데는 최초 합격. 그리고 1군데는 불합격이었다. 


 형이 대학교 입학할 때와는 달리, 예비로 걸리는 것 없이 최조 합격을 받은 나를 보며 부모님은 내심 재수를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계셨다. 재수하기 싫으면 '반수'라도 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다. 하지만, 내게 있어 3년은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간이 아니었고, 다시 그 때의 마음을 먹기에는 이미 성인의 맛을 느껴버린 다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합격한 학교가 서울에서 상위 10위 안에 드는 곳이었기에 굳이 재수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의 바람을 뒤로한 채 합격한 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정했다. 


 2007년 2월. 합격이라는 결과를 가지고 학창시절 중 가장 치열했던 3년을 보낸 친구들과 함께 포항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한 달 뒤. 예전부터 꿈에 그렸던 서울살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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