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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봄꽃 Jul 14. 2019

[그림책:방] 이야기와 사랑

훨훨 간다 / 권정생 글, 김용철 그림 / 국민 서관

산골 외딴 집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산다. 할아버지는 종일 밭에서 일하고, 할머니는 길쌈을 한다. 할머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할아버지가 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면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른다. 하지만 일생을 산골에서 일만 하고 살아온 할아버지는 들은 이야기도 없고, 이야기를 지어낼 줄도 몰라 할머니에게 해 줄 이야기가 없다.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를 무시하거나 이야기 하나 못 해주냐며 화를 내지도 않는다. 대신에 할아버지에게 자신이 며칠을 고생해서 짠 무명 한 필을 이야기 한 자리와 바꿔와 달라는 부탁을 한다. 할아버지는 그런 할머니의 부탁에 대해 논리적으로 생각하거나 실속을 따지지 않고 다만 어떻게 들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집을 나선다.


옛날에 무명 한 필이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무명은 조선시대 평민들의 옷감이었다. 무명 한 필은 너비 37.4 센티미터에 길이는 자그마치 16미터나 된다. 무명 한 필을 내다 팔면 쌀 한 가마니를 받을 수 있었다. 무명 한 필을 짜기 위해 할머니는 오랜 시간 베틀 앞에서 부지런히 손과 발을 놀려 일을 했을 것이다. 할머니는 자신이 그렇게 고생해서 짠 무명 한 필을 쌀 한 가마니 대신에 이야기 한 자리와 바꿔오라고 한 것이다.


잇속 밝은 사람이라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대목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먹고사는 고생을 일생토록 한 할머니가 쌀 한 가마니와 이야기 한 자리를 바꿀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할아버지라도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하는데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말에 무명 한 필을 어깨에 메고 장으로 향한다. 할머니도 이상하지만 할아버지도 이상하다.


할아버지는 시장에서 무명 한 필을 잘 팔았을까? 이야기 한 자리에 무명 한 필을 판다고 하면 사람들이 너도나도 사겠다고 달려들었을 것 같지만, 할아버지는 시장에서 무명을 팔지 못했다. 사려고 온 손님들이 할아버지 말을 믿지 못하고 그냥 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야기 한 자리에 무명 한 필을 판다는 허무맹랑한 소리에 화를 내며 돌아갔다.


할아버지도 참 미련하다. 나 같으면 쌀 한 가마니를 받고 무명 한 필을 팔겠다. 그리고 시장을 돌아다니며 아무나 붙잡고 이야기 한 자리만 해 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시장에 나온 사람들에게 이야기 동냥만 하고 다녔어도 수십 개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 아닌가! 아니면 이야기를 지어낼 수도 있다. 시장 구석구석 얼마나 재미있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을 것인가? 이야기란 사람들이 모인 자리마다 생겨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시장에서 할아버지는 이야기를 지어내지도, 이야기를 사지도, 무명 한 필을 팔지도 못했다. 미련하기는 하지만 할아버지가 딱하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해 줄 이야기 한 자리를 가져가지 못하는 것만 걱정이다. 할머니의 실망하는 표정을 떠올리니 할아버지의 발걸음도 무겁다. 내가 할아버지를 만났다면 이야기 몇 자리를 들려드렸을 텐데! 내 이야기보따리에는 이야기가 한가득 들어있으니 말이다.


아쉽게도 나는 책 속으로 들어가지를 못하니 할아버지는 나를 만나지 못한다. 대신 할아버지는 코가 빨간 농부 아저씨를 만난다. 이 아저씨는 오지랖이 넓은 사람인지, 한숨을 쉬며 지나가는 할아버지에게 말을 건다. 아니면 마침 무명이 필요했는데 무명을 메고 가는 할아버지를 보니 팔러 가나 보다 짐작하고 값이 궁금했을 수도 있다. 할아버지가 무명 한 필 값으로 이야기 한 자리를 말하자, 빨간 코 농부 아저씨는 냉큼 자신이 사겠다며 나선다. 빨간 코 농부 아저씨는 어쩌다 큰 횡재를 만났다. 덜떨어지고 어수룩한 할아버지에게서 공짜로 무명 한 필을 받게 생겼으니 말이다.


빨간 코 농부 아저씨는 마침 논에 날아온 황새 한 마리를 보며 이야기 한 자리를 지어낸다. “훨훨 온다. 성큼성큼 걷는다. 기웃기웃 살핀다. 콕 집어먹는다. 예끼, 이놈! 훨훨 간다.” 빨간 코 농부 아저씨가 대충 지어낸 이야기 하나에 할아버지는 기뻐하며 집으로 황새가 날아가는 것처럼 훨훨 집으로 달려간다. 이야기 같지도 않은, 참 별것 아닌 이야기 한 자리에 무명 한 필을 팔고 저렇게 기뻐하다니! 나는 또 한 번 할아버지가 안타깝다. 할머니는 과연 할아버지가 가져가는 이야기를 좋아할까?


하루 온종일 할아버지만 기다린 할머니는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할아버지를 반갑게 맞이한다. 할머니는 이야기를 들을 생각에 어린아이와 같은 얼굴로 할아버지를 향해 앉는다. 그런 할머니를 보며 할아버지는 절로 어깨가 으쓱해진다. 마치 귀한 보물을 얻어온 사람처럼 할머니 앞에서 면이 선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막 시작할 때, 도둑이 할아버지 집 담을 넘어온다. 아무것도 모르는 할아버지는 큰 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할머니도 큰 소리로 할아버지가 하는 이야기를 따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도둑도 마찬가지다. 몰래 집 담을 넘는데 “훨훨 온다.” 소리를 들었으니 도둑이 얼마나 놀랐을 것인가? 도둑이 급히 부엌으로 가는데 이번에는 “성큼성큼 걷는다.”라는 소리가 들린다. 도둑은 얼른 무엇이든 하나 가지고 나가야겠다 싶어 부엌을 살핀다. 그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기웃기웃 살핀다.”라고 말한다. 문득 도둑의 눈에 낮에 할머니가 만들어둔 누룽지가 들어온다. 저것이나 들고 얼른 나가자는 생각으로 누룽지를 손에 드는데 할아버지가 갑자기 “예끼, 이놈!”하는 것이 아닌가? 도둑이 얼마나 오금이 저렸을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도둑은 정신없이 다시 집 담을 넘어간다. 그런 도둑 뒤로 “훨훨 간다.”하는 소리가 따라붙는다. 도둑은 다른 집에서 훔친 보따리가 담에 걸린 줄도 모르고 걸음아 날 살려라하며 도망을 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서로 박수를 마주치며 즐거워한다.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방방 뛰며 웃는다. 할머니는 어디서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바꿔 왔냐며 할아버지를 칭찬하고, 할아버지는 자랑스레 빨간 코 농부 아저씨에 대해 알려준다. 그런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다정하고 순진한 모습에 내내 답답했던 마음이 씻겨나간다. 내 얼굴에도 웃음이 그려진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처럼만 살면 이 세상 참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다. 궁핍한 살림을 꾸리며 고되게 살면서도 이야기 한 자리에 뛸 듯이 기뻐할 수 있으니 말이다. 미련하고 이상하기만 한 줄 알았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높이 세워주고, 할아버지가 가져온 것에 기뻐하며 고마워한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귀하게 여기며 할머니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우리 부부를 돌아본다. 마음이 붉어진다. 남편은 할아버지와 어느 정도 닮아있는 것 같은데, 나는 할머니와 영 딴판이다. 남편을 타박하고, 평가하고, 남편이 나를 위해 해주는 일들에 고마워하기보다 당연하게 생각한다. 어릴 시절부터 오랜 시간 보았던 아빠의 나쁜 모습이 내 속에 그대로 박혀있는 것 같다. 이걸 어떻게 뽑아내야 할지 모르겠다. 나도 할머니처럼 순하고 예쁜 아내가 되고 싶다. 내 거친 심사가 비단결처럼 보드라워지도록 매일 부지런히 마음을 사포질해야겠다. 남편을 사랑하는 일은 몸의 수고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사랑은 부지런히 밥을 해 먹이고 집안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마음의 수고도 필요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처럼 나이를 먹어도 부부가 알콩달콩 예쁘게 살 수 있다면, 그것만큼 인생에 큰 기쁨이 어디 있을까? 우리의 이야기보따리에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채워가며 살아야겠다. 어느 늦은 밤 남편과 함께 앉아 이야기 한 자리씩 꺼내면서, 서로를 향해 훨훨 오고 갔던 마음을 소중하게 나누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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