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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레린 Clairene Oct 21. 2024

그때 그 시절이 그립다

그 여름날 외할머니 댁의 추억

“할머니~~”

내가 일곱 살이던 여름날, 우리 가족은 시골 외가댁으로 여행을 갔다. 충청남도 태안, 거기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간 바닷가에 있던 외가댁. 나는 도착하자마자 얼른 차에서 내려 다다다다 뛰어 들어갔다. 외가댁에는 할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이모와 삼촌들만 우리를 반겨주었다. 나는 술래잡기 놀이를 하듯, 온 집안을 뛰어다니며 숨어 계실(?) 외할머니를 찾아다녔다. 동생들도 나를 따라 도도도도 따라다녔다. 우리에게 ‘멍멍’ 짖으며 꼬리를 흔들던 개들도 우리가 하는 양이 재미있어 보였는지 얼른 좇아들 온다. 조그마한 우리들은 한 줄로 길게 늘어서 기차놀이 하듯 '우다다다 우다다다' 거리며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안방에서 사랑방, 저 멀리 떨어진 이모, 삼촌들 방 쪽으로, 그리고 앞뜰과 뒤뜰까지. 기차놀이(?)가 재미있었던지, 막냇동생이 갑자기 ‘칙칙폭폭~칙칙폭폭’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우리 삼 남매는 까르르 웃으며 숨어계신 할머니를 찾아 기차여행을 계속했다. 이윽고 지친 우리가 대청마루에 널브러져 버리자, 미소 지으며 우리를 보던 이모가 다가와서 살짝 귀띔해 준다.

“할머니는 저어기~, 옥수수밭에 계셔.”

아, 거기에 계셨구나. 우리는 다시 뒷문을 빠져나와 오른쪽 길을 따라 나아간다. 펌프 수돗가를 지나고, 커다란 장독들을 지나자 눈앞에 초록빛 가득한 옥수수밭이 펼쳐진다. 하지만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 저희 왔어요~~ 어디 계세요?”

나는 손을 나팔처럼 모아 입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할머니 목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뛰어가니,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쓴 할머니께서 풀밭에 주저앉아 계셨다. 노랗게 잘 익은 옥수수를 따서 옆에 있는 커다란 광주리에 담고 계셨다.

“아이고, 내 새끼들 왔어? 너희들 간식 주려고 옥수수 캐고 있었어.”

“와, 맛있겠다!”

“나도!” “나도 나도! 옥수수 좋아하는데~”

우리들은 이구동성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외할머니는 에너지가 넘치는 우리가 귀여웠던지, 새까맣게 탄 얼굴에 흐린 미소를 띠며 내 손을 잡아주셨다. 외할머니는 시골이라 먹을 것이 없다면서, 옥수수와 찐빵을 우리에게 잔뜩 안겨 주셨다. 먹을 만한 것이 흔하지 않던 어린 시절, 시골에서 먹는 간식은 꿀맛이었다.


외가댁에서 여독을 풀고, 이삼 일을 보내다 보면, 대전 이모가족과 인천 둘째 삼촌 가족이 도착했다. 이렇게 세 가족이 시골 외가댁에 함께 모이면, 그 큰 집이 사람들로 가득 차 북적댔다. 거기에 젊었던 넷째 외삼촌과 막내 외삼촌, 막내 이모까지 함께 하면, 스무 명에서 딱 한 명 부족한 열아홉 명의 삼대 대가족이 함께 모여 여름을 보냈다. 가족들이 다 모이자, 그 이튿날부터 우리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동심 가득한 어린아이들은 삼촌들과 이모, 아빠들과 함께 바다로 나갔다. 나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일곱 명의 동생들과 함께 씩씩한 발검걸음으로 출발했다. 한 손에는 튜브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막냇동생의 손을 잡은 채 흙길을 따라 내려가면 바다 특유의 짠내가 풍기기 시작한다. 푸르른 소나무 숲이 눈앞에 펼쳐져 있고,  그 바로 너머엔 파란 바다가 넘실거린다. 우린 튜브를 몸에 끼고 얼른 바다에 뛰어들었다. 파도가 몰아쳐서 바닷물이 방울방울 내 얼굴에 튀어 오른다.

“아이, 짜!”

너무나 짠 바닷물을 먹고 나는 오만상을 찌푸린다. 아빠는 우리들을 이끌고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셨다. 크게 너울지는 파도타기는 나와 여동생이 좋아하던 자연산 여름놀이였다. 삼촌들도 신이 나서 파도타기를 했다.

“앙! 무서워~나 나갈래!”

아직 어린 막냇동생은 파도에 몸이 잠기자마자 울보답게 울음을 바로 터트린다. 아빠에게 안겨 아빠 목을 꼭 잡고 있으면서 뭐가 그리 무섭다고 난리인지...  아빠는 우리들을 삼촌에게 부탁한 뒤 남동생을 데리고 모래사장으로 나가신다. 발을 휘저으며 신나게 놀다 보니 힘이 금세 빠졌다.

물에서 나와보니 남동생은 아빠와 함께 커다란 모래성을 만들어놨다. 뿌듯한 얼굴로 우리에게 성을 자랑하더니 개구지게 웃는다. 모래벽 위에 돌을 촘촘히 쌓아 두르고, 모래벽 안에는 물을 넣어서 꽤 봐줄 만했다.

"히히히, 내 성 최고지?"

“응! 와, 멋있다! 너무 잘 만들었는데?”

나와 여동생은 남동생을 폭풍이 지나가듯 정신없이 칭찬해 주고 함께 모래놀이를 시작한다. 옆에 앉아 계신 아빠에게도 모래장난을 쳐본다. 아빠의 양 발에 모래를 덮으니, 아빠가 간지럽다고 웃으신다. 어느덧 바닷속에서 삼촌, 이모부와 사촌들이 모두 나와 우리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같이 모래성을 쌓기 시작한다. 고사리 같은 손들이 모여 모래성을 투닥투닥 만들자, 모래 속에 숨어있는 작은 게들이 놀랐는지 '후다닥' 도망가버린다. 어떤 게는 모래사장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는데, 숨 쉬는 모래구멍이 여기저기 뚫려있어 살아있는 것처럼 뻐금거렸다.

모래성 안에 있는 찰랑거리는 투명한 바닷물 사이로 아주 작은 새우가 헤엄을 친다. 우리는 손가락 마디만큼 작은 갯벌 동물들이 모래사장에서 움직이는 모습이 신기했다. 얼굴이 땅에 닿을 것처럼 바닥 가까이 대고 열심히 관찰했다.  

아, 벌써 바닷물이 저 멀리 빠졌다. 이제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 우리 모두는 우르르 집으로 몰려가 몸을 씻고 편히 쉬었다. 어느덧 밤이 되자, 삼촌들은 집 안마당에 캠프파이어처럼 장작을 쌓아 불을 붙이고 빙 둘러앉았다. 우리도 끼어들어 막내 삼촌의 기타 선율과 노랫소리를 들었다. 노래하면 빠지지 않던 넷째 삼촌과 막내 이모도 고운 목소리로 함께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여름밤을 보냈다.

      

이튿날 오후에는 엄마들까지 함께 모여 광주리와 삽, 장갑을 챙겨 들고 바다로 출발했다. 그날은 바다 갯벌에 사는 조개를 캐기로 한 날. 우리는 물이 빠진 바다에 도착해 허리를 구부리고 진득한 갯벌 사이에 숨어있는 조개들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엄마 말로는 그곳이 바지락 밭이란다. 예쁜 조개껍질과 조약돌은 덤으로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신이 나서 보물 찾기를 하듯 한여름 갯벌을 쏘다녔다. 일반 조개도 찾고, 가끔 키조개라 불리는 커다란 것도 힘을 주면 뽑아낼 수 있었다. 햇빛이 강해지자 우리는 모두 외가댁으로 돌아갔다. 그 잠깐의 노동으로 얼굴이 빨갛게 익어버렸다. 외할머니는 우리가 따온 바지락을 가득 넣어 시원하고 구수한 된장찌개를 만들어 저녁상에 내주셨다. 노동한 후에는 뭐든 맛있는 법.

“내일은 바지락 칼국수 해 먹자.”

외할머니 말씀에 밥을 먹고 있는 중에도 군침이 쓱 돌았다.  


 아뿔싸, 문제는 그날 밤에 터졌다. 우리가 한여름 낮에 갯벌에서 몇 시간을 있다 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복병이 나온 것이다. 그날 직사광선이 너무 강했던지, 잠이 들었던 아이들 모두 등과 목이 새빨갛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등과 목, 어깨까지 너무 뜨겁고 쓰라리고 아팠다.  잠에서 깬 어린 남동생은 울기 시작했다. 몸은 아프고 정신은 혼미한데 옆에서는 시끄럽고 정말 혼란스러운 밤이었다.

'어른들은 멀쩡한데, 왜 우리들만 아플까? 아휴, 나라도 의젓하게 있어야겠다. 여행 와서 이게 뭐람...'

 우리는 낮에도 화상부위에 연고를 바르고 시무룩하게 내내 엎드려 누워 있어야 했다. '돌돌돌' 돌아가는 선풍기 앞에 셋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낮보다는 확실히 밤이 더 문제였다. 밤이 되면 열이 올라 끙끙 앓으며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경험했던 그 어떤 병보다도 몸이 계속 아팠다. 한여름 갯벌 노동의 현장을 종횡무진 함께 했던 작은 일꾼들은 삼일 내내 앓아누우며 여행기간을 보냈다. 앓던 도중에 옆에서 얼음을 가져다주며 걱정하시던 엄마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앓아누운 지 나흘째 되는 날, 드디어 등의 살껍질이 살살 벗겨졌다. 빨갛게 익어 있던 등은 밤색으로 바뀌었다. 드디어 화상의 고통에서 해방된 것이다. 그다음 날 우리는 짐을 싸서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렇게 외가댁 여행은 끝이 나버렸다.


즐거웠지만 탈도 많았던 그 여름 어린 시절의 나. 그리고 나를 사랑해 주셨던. 지금은 우리 곁을 떠나 만날 수 없는 외할머니와 아빠. 오늘따라 더 그립다. 어느새 세월이 깃든 엄마와 삼촌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어린 시절 외가댁에서 함께 웃고 노래 불렀던 젊은 청춘과 젊었던 엄마가 보고 싶다. 그 시절이 그리운 까닭은 무엇일까. 아무 걱정 없이 웃을 수 있었던 나와, 내가 사랑하던 가족들의 모습이 그립기 때문일까. 가장 행복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동안 내 머리 서랍 속에 깊숙이 넣어두고 잊고 있었던 영화, ‘그 여름날 외할머니 댁의 추억’. 이제 다시 틀어 찬찬히 보아야겠다. 그리고 엄마와 동생들에게도 함께 그 영화 속으로 빠져보자고 해야겠다. 훈훈해질 다음 모임이 기대된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태안군 공식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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