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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이김 Feb 05. 2022

미역국 대신 곰탕을 먹는 생일


가방에 대하소설 <장 크리스토프> 2권을 챙겨넣었다가 집을 떠나기 직전 도로 꺼냈다. 노트북과 노트, 종류가 제각기 다른 펜과 샤프펜슬로 가득한 가방에 한 손으로 들기 벅찬 두꺼운 책을 넣는 건 좀 미련스러운 짓이지만 난 매번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늘 가방은 미어터질듯이 탐욕스럽게 채워지지만 나의 외출이 읽기와 쓰기를 모두 성공시킨 적은 없다. 쭉 읽기만 하거나 계속 쓰기만 해도 카페가 불어넣는 산뜻한 집중력은 반나절만에 소진되고 마는 것이다.


사용되지 못한 노트북과 노트, 그리고 책을 한참 짊어지고 다니다보니 이젠 가방을 챙길 때면 어떤 예감에 사로잡힌다. 오늘은 쓰여질 것인지 읽혀질 것인지, 이것을 수동태로 표현하는 것은 이 집중력의 쓰임새가 내 마음대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욕과 의도로만 헤아리자면 나는 읽기와 쓰기를 모두 하고 싶었으나 늘 그러지 못했다.


인간이 마음을 먹으면 못할 것이 없다는 말은 내가 생각하기에 이 세상의 진실을 반 정도밖에 담아내지 못했다. 마음을 먹고 시도하는 것까지는 인력으로 가능한 일이나 그 일의 성패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자유 의지론의 반대편 협곡에서 세상 만사 모든 것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운명론의 메아리가 떠도는 것처럼.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도 정력적으로 살고 있는 지금, 나는 <장 크리스토프>를 꺼내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을 내려놓는 수련을 하고 있기도 하다. 가장 양질의 집중력을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 혹시 무언가를 빨아들이고 싶은 때가 와도 그건 반드시 책이 아니어도 된다. 시인은 바로 앞의 검은 휴대폰 화면에 찍힌 지문을 보고도 빗방울이 제각기 다른 속도로 울려퍼지고 있는 밤의 유리창으로 볼 줄 알아야 하니까, 볼 것은 어디든 넘쳐난다.


오늘은 미역국을 마땅히 먹어도 되는 날이지만 살림 머리 없는 1인 가구는 제 분수를 알고 그런건 애시당초 기대도 하지 않았다. 대신 든든한 식사를 위해 3대째 이 동네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는 곰탕집에 다녀왔는데 그 곳에서 만난 인물이 하도 감명 깊어 내 생일을 위한 찬가가 이렇게 완성될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 인물은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국밥집 이모'의 스테레오 타입을 강력하게 쳐부수었다고 칭할 수 있을 정도로 우아한 여인이었다. 내가 들어왔을 때 손님은 아무도 없었기에 문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그녀가 건네는 인사소리를 또렷히 들을 수 있었다. 부러질듯이 높고 갸날픈 목소리였지만 맑았기에 그 목소리를 들으려 귀가 자연스레 긴장할 수 밖에 없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내가 경험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굳어진 이미지로 갖고 있던 국밥집 이모의 관념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서 있었으므로 나는 뒤이어 들어온 두 손님에게 그녀가 인사했을 때 나도 모르게 그 목소리가 가장된 것인지 아니면 그녀 본연의 것인지 다시 한번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세파에 찌들려 모든 일에서 감흥을 잃어버린 중장년의 그것이 아니라 아직도 생의 기쁨과 슬픔에 한없이 흔들리며 감동하고도 마는 사춘기 소녀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이 여주인 안에 청춘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굴뚝의 연기같은 존재일 뿐, 이 존재의 참된 모습은 그녀가 손님을 대하는 다정스런 태도에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소주 광고가 그려진 레디메이드 물병 한통을 우리에게 건네는 대신에 '따뜻한 물을 드릴까요?'라고 물어보더니 그것을 원하는 손님에게 한 잔씩을 직접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그 물은 통째로 데워진 주전자나 스테인리스 물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직접 따라준 것이 분명하다는 인상을 줄 정도로 먹기 좋게 살짝 따뜻했다.


내가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몸가짐과 말투가 투박한 중년의 사내가 들어와서 곰탕을 주문했는데, 그도 여주인의 우아한 태도에 약간 당황하는 눈치였다. 곰탕 하나 주세요, 라고 거칠게 외치던 그의 목소리는 여주인이 물을 가져다줄 때 한껏 누그러져 있었다.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여유로운 걸음걸이와 마스크 너머까지 침범하는 온화한 표정으로 보여주는 그녀를 보느라 식사를 기다리는 시간은 단박에 껑충거리며 간격을 뛰어넘었다. 더할 나위없이 정갈한 식사—간이 살짝 덜 되어 김치와 같이 먹을 때 딱 알맞은 것마저도 마음에 들었다—에서 여주인의 삶의 태도를 느끼며 나는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자유를 부르짖으면서도 실은 이 사회가 부여한 국밥집 이모의 고정관념에 구속당해있던 애석한 내 식견이란! 그녀는 '국밥집 주인치고' 우아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이 아니라 그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귀족적인 느긋함과 넓은 아량이 있었다. 멋과 뽐을 내는 식당이 아니라 추운 날 온기를 채우고 싶은 손님들이 찾는 식당에서 여주인의 소박한 옷차림 속에 그것이 묻혀 있었기에 더욱 도드라져 보인 것일 뿐.


그녀는 내가 계산을 하고 나갈 때까지 내 부슬부슬한 머리 스타일과 거침없는 나의 식성(ㅋㅋㅋ)에 나에게서 건강미를 찾아볼 수 있다는 칭찬을 하더니 문까지 잡아주며 배웅 인사를 건넸다. 벙거지 모자 속에서 조금 흘러나온 회색 머리카락 몇 올과 문을 잡아주던 그녀에게 인사를 하며 올려다본 눈가의 주름에서 나는 그녀가 문을 닫고 아주 느린 탱고 스텝같은 걸음걸이로 제자리로 돌아갈 것임을 보았다.


좋은 하루 보내요.


나는 12초 밖에 남지 않은 횡단보도를 뛰어서 가로지르며 그녀가 칭찬한 내 사자머리를 마구 흩날렸다. 지금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 산발을 감수하고 뛰어가지만 나는 이것을 그녀처럼 어디에 있든 평화롭고 자신의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규정했다.


 높은 경지의 작품을 위해선 역설적으로 < 크리스토프> 내려놓아야만 하던 오늘 아침처럼  세계의 진리는  하나의 면모만으로 추구되지 않는다. 하고자 하는 이가 절제하고 인내하며 모든 것이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만은 않는다는 운명론의 메아리를 되뇌이는 것처럼 부유하는 나뭇가지가 끝없는 왈츠를 추는 한계 모를 바다가 되기 위해 나는 깜박이는 초록불의 족쇄 안에 잽싸게 발을 던지는 것이다.


생일날 미역국 대신 먹은 곰탕은 전혀 모르는 여인으로부터 전해진 축하와 함께 내 앞날을 이렇게 계시한다. 잔잔한 동심원 바깥으로 헤엄치기를 택한 그대 백조는 결국 이 호수에 파문을 그리며 그 자신이 만든 물결에 때로는 허덕일지도 모르나 끝내 발견하고 마리라. 그 경계 너머에 얼마나 넓고 무한한 항해의 지대가 있으며 수면 아래 그대의 작은 발이 절실히 사투를 벌일지언정 그대 심장은 더욱 강하게 생동해 전보다 분주히 움직이는 것은 더이상 문제가 되지도 않을 만큼 그대의 자연스러운 호흡이 되리라.


그래서 나는 이 아무일 없는 고요한 호수의 수면 아래서 내 작은 발을 오늘도 분주히 움직인다. 지금은 비록 작은 기포만이 아주 드문하게 뻐금거려 내 발짓의 효과는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지 모르나 백조는 그 발짓으로 인해 꿈꾸는 것이다. 이 작은 헤엄이 저 아래에 차곡히 물보라를 쌓아올려 언젠가는 지상으로 비집고 나올 폭풍우를 일으킬 것을, 그리고 백조는 그에 휩쓸려 한번도 가보지 못한 거대한 물결 위로 올라탈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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