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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이김 Apr 28. 2022

망각적 파르티타


  타자판에 손가락을 올려놓겠다는 결단 하나가 작은 웅덩이를 폴짝거린다. 그 중 어디 하나에 발을 빠뜨렸다간 다리에서부터 그 곳에 고인 탁한 색깔로 물들어갈 것임을 알면서도 손톱을 깎지 않은 동안 임시 저장글 토막 하나 없이 산문을 쓰지 않고 지냈다. 노트에 부리를 대고 속을 파먹는 펜이 손가락 마디에 굳은 살을 각인하는 데만 해도 벅찼는지 삼킨 것들을 손끝 너머로 떨치지는 못하고 있었다. 거대한 말을 한번에 쏟아버리려 할 때 타자판과 손가락 사이에 장벽이 10개나 존재한다면 그것은 훨씬 숨이 막히는 일이다. 먼 대양으로 흘러가지 못한 물줄기는 웅덩이에 고인 채 썩고 만다.


  오랜만에 바닥에 앉아 손톱을 흰 티슈 위에 올려놓았고, 그 위에 굵은 발톱이 나무 열매처럼 뭉툭하게 떨어졌다. 오른발 세번째 발가락의 발톱을 뜯어내자 유난히 직각을 이루는 발톱의 끝이 두번째 발가락살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어떤 여름에는 두번째 발가락에서 피가 나기도 했지만 세번째 발가락의 발톱을 떼어냈을 때 고통이 없어지는 느낌이 든다거나 해방감이 들진 않았다. 발톱이 발가락살을 파고드는 압력은 손톱을 깎지 않는 동안 지속되었고 아주 서서히 자라났기에 나는 그것을 잊었다.


  휴지를 뭉쳐 쓰레기통에 버리고 지나친 스피커에선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가 울려퍼지고 있다. 침대와 창가의 벽 사이로 끼어들어가 창문을 열자 오토바이의 소음과 음주의 즐거움에 취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조금 솟아오르다가 가라앉았다. 이 커다란 창에 방충망이 없다는 사실은 이제 흰 벽에 붙어있는 벌레가 보이지 않는 이상 의식할 수 없다. 방충망이 없는 창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당황스러움은 벌레들이 생각보다 잘 들어오지 않고 들어온다고 해도 천장으로 날아오르다 어느샌가 죽은 채 발견된다는 경험이 쌓여가면서 사라져 갔다.


  그러나 들썩이는 바깥 소리가 음악을 묻어버렸기에 금방 창을 닫았다. 듣고 있는 이 음악이 옛날엔 관심조차도 두지 않았던 바흐의, 그것도 아무런 반주도 없는 바이올린 파르티타라는 사실또한 손톱을 깎지 않았다면 떠오르지 않았을 일이다. 쇼팽의 낭만성을 좋아한다며 쇼팽의 녹턴 몇 가지를 가장 좋아하는 음악으로 꼽던 지난 날도 망각된 대상일까 생각해보지만 이 가지에 걸려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쇼팽은 그저 뜨겁고도 우울한 음악이라고 빈약하게 말할 뿐이었던 시절, 주위에서 친절하게 대신 얹어준 외부적 자극에 묵직해진 가지를 내가 열리게 한 열매인 체 했다. 그 모든 것이 왜 낭만적인지도 알 지 못한 채 피아노의 왕자를 예찬하고 그 애수에 공감한다고 했지만 그래서 쇼팽에서 무엇을 보았냐는 스스로의 질문에 지금 이 글처럼 그 답을 꽃봉오리에서 툭, 하고 벌어져나와 움트는 꽃이 피운 고뇌의 풍성함으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어쩌다가 아무런 격정이 없어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바흐의 음악을 듣기 위해 지금은 창문까지 닫고 있는 것일까. 화병에서 무너져 있는 프리지아를 꺼내 그 속의 무용한 물을 버렸다. 이미 생기를 모두 소진한 프리지아는 손톱에 스치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쭈그러들어 고개를 숙인 마른 꽃을 그대로 꽂아두며 봄이면 흔하게 보이는 파스텔톤의 시즌성 그림을 떠올렸다. 모든 형태가 결정되어 있는 그림을 요즘 3초 이상 바라보기 힘들다는 것을 미술관에서의 발걸음이 말해준다. 구체적인 형상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난 무엇을 보고 싶은 것인지, 그래서 나는 덕수궁 안의 나무 의자에 앉아 바람에 떨어지던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눈물을 떨어뜨리고 에코백 속에 카탈로그를 강박적으로 집어넣으며 홀로 사진을 찍는 여대생을 뒤돌아 바라보기까지 했던 것일까.


   'Oblivion'이라는 명곡을 남긴 피아졸라는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10년 넘게 공부해왔던 클래식을 잊어버려야만 했다. 넌 문학을 좋아하니 네가 듣는 노래의 가사에 대해선 잘 알고 있지 않냐는 누군가의 물음에 나는 그렇지 않다고 이제서야 답한다. 십 수년 째 그 노래를 들었어도 가장 좋아하는 가사 한 구절을 대 보라는 물음에 여전히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음악이 시작되면 음악이 달고 있는 말은 흐려지고 나는 그 너머 다른 것을 듣고 있다. 사창가의 음악이라고 멸시 받던 탱고를 날 때부터 간직한 피아졸라는 특히 바흐를 좋아했다. 방충망이 없는 창문을 열며 이젠 누구도 미세먼지를 그다지 걱정하지 않고 살게 되어버린 세상이란 너무 참혹하다고, 그런데 나는 이런 세계를 보기 위해서 태어난 것은 아닌지 손등을 가까이 갖다대고 잊혀진 여름의 흔적을 보기 위해 일부러 희미해진 기미를 들여다본다. 피아졸라는 바흐를 잊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 다시 태어났다.


22.04.28 밤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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