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의 생존 기술
디자이너의 글쓰기라. 제목을 쓰고 보니 왠지 추상적인 것 같으면서 거창한 느낌이 든다. 왜일까? 디자이너는 글쓰기에 약하다는 편견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디자이너와 글쓰기는 어울리지 않아서? 그것도 아니면 디자이너는 글을 잘 쓰지 못해서? 음... 그렇다면, 나는 왜 이렇게 글을 쓸까. 디자이너인 나는, 언제 처음 글을 쓰게 되었을까.
디자인이라는 큰 틀의 주제로 글을 처음 써본 건, 대학 시절 전공 수업 중 하나였던 출판디자인 수업 때였다. 대상을 바라보고, 그 대상을 시각화하며 다양한 패턴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작업과 함께 글로 표현해 책으로 엮어내는 수업이었다. '시각화하는 과정'을 '글'로 표현하는 것. 글 역시 디자인의 일환이었다. 아주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내가 선택한 대상을 다방면으로 관찰하고 찾아보며 심도 있게 글과 디자인을 함께 녹여내는 것. 디자이너에게 글쓰기는 단순한 단어의 나열이 아닌, 디자인을 하는 모든 과정을 '언어화'하는 작업임을 알게 되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나는 작은 디자인 회사에 출근했다. 아주 오래전이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분명한 건 내가 알아보고 간 회사는 아니었다. 졸업과 동시에 바로 돈을 벌어야 했던 나는 어디든 직장을 다녀야 했으니까. 그 당시에는 야근이며 철야며, 너무나도 당연한 때였다. 막차가 끊겨 몇 번 택시를 타야 했는데, 아무래도 집이 너무 멀어서 그랬는지(홍대→경기 광주) 대표는 나에게 그냥 근처 찜질방에서 자면 안 되겠냐고 했다. 버텨보려 했지만, 결국 그럴 수는 없어서 6개월 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좀 더 내실 있는(?) 회사를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돈은 계속 벌어야 했기에, 나는 NHN 계열사 중 한 곳에서 3개월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디자인 업무라고 해봐야 자사 홈페이지 내 일부 버튼 아이콘 따위를 만드는 아주 간단한 일뿐이었다. 거기에 네이버 도서관 오픈 준비로 분주했던, 그 규모에 놀랐던, 이전 회사와 달리 고작 아르바이트생이었던 나를 참 잘 챙겨줬던 기억이 난다.
내가 거기서 첫 출근을 하자마자 가장 먼저 배웠던 일은 놀랍게도 '이메일 쓰기'였다. 나를 주로 관리/담당해야 했던 팀 내 직원분은 나에게 제목 쓰는 법, 첫인사와 자기소개, 본론, 끝인사, 마무리 순으로 이메일을 작성하는 요령을 하나하나 알려줬다. 뭘 이런 것까지 알려주나 싶다가도, 이래서 대기업 대기업 하나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시간들이 그 당시엔 많았다.
내가 프리랜서로 지금껏 일할 수 있었던 데에는 물론 여러 종합적인 것들이 쌓인 것이겠지만, 그때의 배움도 한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메일 쓰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길래, 더구나 이메일 쓰기가 디자인과 무슨 상관이 있겠냐고 누군가는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주체적으로 일을 하는 프리랜서 디자이너라면, 꼭 한 번 체크해보아야 할 것 중 하나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일을 하다 보면, 우리는 클라이언트와 매번 만나지 않는다. 작업 파일, 시안은 데이터로 존재하며 우리는 매번 이것을 굳이 외장하드에 옮겨 담아서 직접 클라이언트가 있는 사무실에 찾아가 외장하드를 건네며 시안을 전달하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우편으로 보내는 일도 하지 않는다) 이메일로, 문자(카톡)로 간편히 전할 수 있는 세상이다.
바꿔 말하면, 단순히 이메일 하나 문자 하나는 보내는 행위는 클라이언트를 (온라인으로) 만나는 것과도 같다는 이야기다. 특히나 프리랜서에게는 첫인사이자 때로는 포트폴리오에 버금가는 인상을 좌우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늘, 이메일을 쓰거나 문자를 보낼 때, 글줄 하나 문자 하나 입력할 때마다 상대를, 그러니까 클라이언트를 생각하며 고민해서 쓴다. 시안을 보내며 시안을 하나하나 설명할 때에도, 디자이너의 의도를 잘 알아차릴 수 있도록 마치 발표하듯, 정리하며 글을 쓴다. 당연히 정답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10년 간 프리랜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런 '글쓰기'가 있다.
글을 잘 쓴다고 프리랜서에게 일이 더 많이 생기거나 하는 건 아니다. 눈에 보이는 인과성은 뚜렷하지 않을 수 있다. 프리랜서에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글쓰기보다는 아마, 실질적인 '일을 따오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생존과 직결되어 있으니까.
나 역시 프리랜서라면 당연히 하는 고민들을 늘 안고 산다. 수정을 끝도 없이 요청할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밤낮이고 연락 오는 클라이언트를 어쩌면 좋을지, 추가 작업을 당연시하는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마치 돈 떼먹은 사람이 연락하는 것 마냥 대체 정산일은 왜 안 알려주는지... 클라이언트 입장에선 생각의 염두에 없는(미처 생각지 못했다고 치자) 일들은 사실 10년을 해도 끝나지 않는다.
프리랜서 초기엔 속앓이를 하도 해서 화병이 더러 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놓치지 않은 건, 상대에게 티를 내지 않은 것. 설령 내가 이런 사소한 행위에서 나의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 애썼던 것에 비해, 서두없이 용건만 딱 잘라 이야기하는 클라이언트의 요청을 받았을지언정, 흔들리지 않으려는 태도 말이다. 좋은 클라이언트와 나쁜 클라이언트를 구분하기 전에, 일단 내가 좋은 디자이너가 되자는 마음. 그 마음이 나의 태도가 되었고, 그 태도는 클라이언트를 대하는 모든 글쓰기 행위의 '중심'이 되었다.
클라이언트에게 잘하자.
그들이 잘 돼야 내가 더 잘 된다.
남들이 보기에 조금 우스울 수 있지만, 내 책상 앞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언제나 늘, 좋은 디자이너가 되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일을 대하는 태도가 담긴 문장이다. 언제나 그 마음이 잘 전달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디자인하는 과정을 글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던 그 옛날 대학 시절을 떠올리며, 나의 디자인을 언어화시킨다는 생각으로 이메일을, 문자를, 글을 쓴다.
'글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는 말이 있다. 일을 통해 접하는 글에서는 그 사람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럼 앞서 이야기한 문장에서, '좋은'의 기준은 무엇일까? 아마도 태도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중요한 사실은 단지 그 사람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게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건 아니다. 고작 이메일 하나에서조차 그 사람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면, 그 태도의 중심에는 분명 글쓰기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디자이너에게 글쓰기란, 글을 디자인하는 것, 즉 디자인의 연장선이 아닐까?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고자 이메일을 계속해서 이야기하느라, 마치 프리랜서 디자이너는 이메일을 반드시 꼭 잘 써야만 한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이메일이 아니라 글쓰기다. 이메일은 글쓰기라는 행위의 한 부분일 뿐이다. 제안서가 될 수도 있고, 견적서가 될 수도 있다. 디자이너는 스스로 디자인한 시안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게다가 프리랜서라면, 클라이언트를 설득해야 하는 일이 더 있기에, 더더욱 중요하다. 나는 이메일이나 문자 같은 소통 창구를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진심을 다했다. 이제는 그것이 클라이언트와의 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저기 프리랜서에게 마치 해독제처럼, 비밀 레시피를 알려준다는 사람들이 많다. 프리랜서 영업하는 법, 좋은 클라이언트 만나는 법... 혹시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눈여겨보았다면, 나의 경험도 한 번 눈여겨보는 것도 좋을 거라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유효했고, 아직까지는 유효하고 있으니, 혹시 글쓰기에 조금 막막함을 느끼는 프리랜서가 이 글을 본다면 조금이라도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글쓰기라고 하면 막연하고, '프리랜서 디자이너의 글쓰기'라고 하면 왠지 더 주춤하게 된다. 하지만 글쓰기는 말 그대로, 글을 쓰는 거니까. 디자이너에겐 내가 디자인한 작업을 글로 쓰며 클라이언트를 설득해 보는 훈련을, 다른 직업군에 속한 프리랜서 역시 자신의 일을 글로 쓰며 상대를 설득해 보는 것. 문자 한 마디 남겨보는 것이 그 첫 시작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시작점이 이어져 나의 가치가 되고, 클라이언트와의 오랜 관계를 유지하는 힘이 되었다는 사실을 오늘도 기억하며, 쓴다! 계속해서 쓰다 보면, 분명 이전보다는 좀 더 나은 내가 될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