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작은 모든 경험들은 무엇보다 값지다
너무 뻔한 말일까...
며칠 전 글쓰기 버튼을 누르고 난 후, 사실은 이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남들이 보기에 내가 대단한 사람이 아닌지라, 마치 그냥 오래 일한 누군가의 꼰대스러운 말이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내 진심은 정말 그게 아닌데. 무언가를 해보려다가도 ‘내가 뭘...’이라는 생각에 여러 번 주저했던 일들이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갔다. 내가 별 것 아니라는 생각. 이 생각을 떨치기 위해서라도 나는 움직여야 했다.
하던 일을 멈추고 강아지와 산책을 다녀왔다. 2.5세의 천방지축 강아지는 매일 같은 길을 산책해도 매일매일 뭐가 그리 궁금한지, 늘 총총거리는 녀석의 뒤꽁무니를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다. 아니, 한 눈을 팔 새가 없다. 오롯이 그에게만 집중! 그래서 비록 천천-히, 주변을 여유롭게 살피는 그런 여유로운 산책은 할 수 없지만, 약간의 우울감을 떨치기엔 역시 산책만 한 게 없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이제는 컴퓨터 앞이 아닌, 식탁 앞에 앉아 전날부터 읽던 책을 쭉 읽어 내려갔다. 함께 읽고 있는 「프리 워커의 책장」에서 발견한 책이다. 앞선 책에서 저자는 초반부터 머리를 세게 얻어맞는 느낌이었다고 했는데, 나는 읽는 내내 마치 심장 폭격을 당한 느낌이었다. 아픈 심장을 부여잡으며(?) 홀린 듯이 그날 밤까지 책을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사실은 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디자이너로서 굉장한 늪에 빠져 있었다. (늪에 빠지는 동안에도 썼던 글) 새롭게 작업한 디자인 시안들은 자꾸만 클라이언트에게서 거절당하고, 직접 만든 디자인 파일을 보내며 ‘그냥 이것처럼 똑같이 만들어서 정리해 주세요’ 하는 등 가슴에 스크래치 나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기 때문이다. 한두 개의 일이 그러했다면 타격감이 좀 적었겠지만(종종 그럴 수 있으니까), 최근 두 달여간 작업한 크고 작은 모든 건의 일들이 그러는 바람에 똑바로 서있기 힘들 지경이었다. 분명 일더미 속에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하반기에 포트폴리오로 내세울 만한 작업이 단 하나도 없을 것 같은 현실이 나를 자꾸만 절망감에 빠뜨렸다.
(…) 브랜드보다는 브랜드를 일궈낸 '사람의 시각'에 집중해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브랜딩이 이루어진다면,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브랜딩은 자연스레 따라오지요.
그렇게 절망감에 빠져있는 나를 꺼내준 문장을 이 책에서 만났다. 브랜드를 포트폴리오와 동일시할 순 없겠지만, 현재의 내 상황에서는 이와 비슷한 셈이라고 생각했다. 아, 어쩌면 나는 지금 나를 소개하는 목적의 포트폴리오에‘만’ 주목하고 있었구나. 나는 왜 이토록 포트폴리오에 집착하는 걸까?
눈에 띄는 (유명한) 대표 작업이 없는 나는 상대적으로 프리랜서 시장에서 불리해. 그러니까 나는 대신 이런저런 일을 다양하게 많이 하고 있다는 걸로 꾸준히 나를 어필해야만 해. 내 모든 작업이 포트폴리오가 될 수 있도록 영혼을 갈아야 해.
내 안을 자리 잡고 있는 생각이었다. 상대적으로 나는 프리랜서 디자이너 시장에서 불리할 거라는 전제 조건을 스스로 정했다. 그리고 유명한 작업도, 당연히 인지도도 없는 편이니 그 대신, 하고 있는 일들이 모두 포트폴리오가 되도록 영혼을 갈아 양질을 높여야 한다는 생각이 포트폴리오에 대한 집착으로 변한 것이다. 이런 집착의 이유는 사실, 나의 깊은 내면 속 불안에서 기인한 행동이었다. 클라이언트에게 사소한 것에 흔들릴 때마다, 노력이 무색하게 예상치 못한 결과물을 디자이너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올 때마다, 불안은 증폭되고 결국 증폭된 불안에 휩싸인 나는 스스로를 ‘그저 그런 포트폴리오 밖에 없는 디자이너’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디자이너에게 포트폴리오는 상당히 중요하다. ‘포트폴리오가 명함’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거기에 매몰되어 ‘가능한 포트폴리오를 많이 올려야 해’ 하는 내 생각은 애초에 불안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결국 언제든 불안이 솟아날 수밖에 없게 된다. 지금처럼.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아니, 해야 하는 일은 바로, ‘잠깐 멈춰서 숨 고르듯, 고개를 들어 무엇보다 내가 나를 보듬는 것’. 내가 내 어깨를 감싸주며, 스스로를 토닥여주는 거다. 내가 나를 제한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타인의 인정보다 내가 스스로를 인정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내가 우선 건강해야, 훗날 타인의 인정도 의심 없이 올곧이 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법이니까.
낯선 곳을 걷다 보면 몇 번 넘어질 수도 있다. 넘어지는 것도 성장의 한 과정이다. 넘어지는 자신을 포용해라. 언젠가는 당신의 가치를 향해 달리고 도약하게 될 것이다. 근육을 키우고 지구력을 기르기까지 시간이 걸릴 뿐이다. _「불안한 완벽주의자를 위한 책」
넘어지는 것도 성장의 한 과정임을 기억하고 포트폴리오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한 뼘 더 성장해 나가는 ‘나’를 보여주는데 집중하는 것. 지금이 어쩌면 책에서 줄곧 이야기하는 퍼스널 브랜딩을 해야 하는 시기가 아닐까?
어쩌면 나는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지금껏 쌓아온 경험’으로 이를 증명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클라이언트에게 포트폴리오를 건네는 일 없이 줄곧 일이 자연스레 이어왔던,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해온 지난 시간 말이다.
자발적 발걸음을 위한 글쓰기 첫 번째 포인트는 전문성이 아니라 ‘내 관점’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나만의 시각. 단순 지식 전달이 아닌, 일상에 나의 시각을 녹여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떠올리게끔 하는 것.
무언가를 검색해서 나온 페이지의 13페이지, 14페이지까지 한참을 넘기다 만난 내 글에 ‘이거다!’ 싶은 순간을 만들어내게 하는 것. 이미 메인스트림을 경험한 이들의 눈을 멈추게 하는 것 말이다.
나에 대한 타인의 무관심,
이를 당연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책상 앞으로, 노트 앞으로 가는 것이다. ‘너무 뻔한 말일까’ 하는 걱정 가득한 생각 따위에 빠지지 말고, 내 이야기에 빠져야 하는 것이다. 일단 쓰고, 일단 해보고, 그 이후에 수정해 나가는 것. 검색 상위에 노출된다고 가치가 높은 게 절대 아니라는 거다. 마치 강남역 한복판에서 소리 지르기와 같다는 저자의 말처럼, 결코 ‘수치=가치’가 아니라는 걸 프리랜서는 늘, 기억해야 한다.
오래도록 일했지만 여전히 언더독 포지션이라는 상황 자체는 순간순간 나를 다시금 불안으로 이끈다.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자리를 지키며 일해온 내 경험, 그리고 일에 대한 마음, 태도를 늘 떠올리는 것. 작은 규모의 일이어도 나를 필요로 했고, 그 역할을 다 했으며, 그들을 만족시킴으로 성과를 얻어 차곡차곡 쌓아온 크고 작은 나의 모든 경험들은 무엇보다 값지기 때문이다.
이 책 제목 앞부분에는 ‘내 생각과 관점을 수익화하는’이라는 문장이 붙는다. 퍼스널 브랜딩을 찾는 이들처럼 솔직히 나 역시 ‘수익화’를 빼놓을 수는 없다고 고백한다. 목적의 시작은 그러했을지언정. 어쩌면 퍼스널 브랜딩이란, 스스로 가치 있는 사람임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그렇게 나에게 집중하다 보면 새로운 기회가 열릴 수 있지 않을까?
앞서 이야기했던 며칠 전 글이 올라간 다음날, 누군가 댓글을 달았다. 자신의 상황과 비슷해 홀린 듯이 ‘끝까지 다 읽었다’는 그 문장에 순간 나는 울컥하고 말았다. 수없이 고민했지만 진심이었던 그 글에 누군가 공감했다는 사실이 나는 무엇보다 기뻤다. 글에 담은 진심을 알아주었다는 사실. 고작 한 두 개의 댓글이지만, 나는 또 이렇게 계속해나갈 힘을 얻는다. 그리고 미약하게나마 쌓아나가는 이런 시간들은, 프리랜서로서 밀도 있는 시간을 쌓아나가는 과정이자 경험이 반드시 되어줄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