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프리랜서 디자이너가 해드리고 싶은 이야기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갖고 산지 어느덧 16년, 그중 프리랜서로는 이제 10년 차를 앞두고 있다. 단지 시간 경력으로 그 사람의 능력과 가치, 인지도를 평가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단 하나 내가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실은 정말 쉼 없이, 꾸준히 일을 해왔다는 것. 학창 시절부터 이어진 생존력과 관계되어 있을 수도 있겠고 소위 말하는 '일개미' 근성을 갖고 태어나 그럴 수도 있겠다. 대학 시절 내내 아르바이트와 근로학생, 디자인 외주 일을 달고 살았고 동기들에게 '일개미 언니' 소리를 들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얼마 전 쓴 글에서처럼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일을 해왔지만, 나는 아직 주목받을 만한 대단한 디자인 작업을 한 적이 별로 없다. 비록 한 번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나는 늘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필요를 채워주며 그들에게 감사함을 얻고 뿌듯함을 성취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진행 중이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어쩌면 그 감사한 마음을 잃지 않아서인지, 프리랜서로 일하는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자연스럽게 일이 쭉 이어졌다. 하나의 일이 끝나면 또 다른 일이 들어오고, 이전에 함께 일했던 사람이 또 다른 일을 연결시켜 주고. 프리랜서 초기에 겪은 이 '관계'의 '연결성'을 몸소 체험해서인지 지금도 나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어딘가에 늘, 반드시 있다’는 이 말을 철석같이 믿는다.
메인이 있으면 서브가 있고 스포트라이트가 있으면 그 옆을 돕는 조력자가 있듯이. 비록 '더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잘한 일은 쳐내야 할 필요도 있다'는 사업가적 마인드는 조금 부족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통해 상대가 잘되고 고마움을 느껴 계속해서 내게 일을 맡기고 또 다른 일을 연결시켜 주게 되는, 보이지 않는 그 힘이 나에게 있다고 믿는다.
명확하게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있다고 믿는, 그것들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수익 보장! 월 천 보장!'과 같은 도파민 폭발하는 키워드는 내게 없지만, 결국 디자인도 프리랜서의 역할도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기에. '나 잘났어요! 나 이만큼 일했어요!'를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나도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당신도 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다.
프리랜서가 되기 전, 5곳의 회사를 다녔다. 출판사부터 디자인 에이전시, 주방용품 회사의 인하우스 디자이너, 복사인쇄업체 디자이너까지. '디자인'이라는 큰 업무는 같았지만 모두 다른 영역의 회사 덕분에 나는 7년이라는 시간 동안 다양한 디자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길어야 2년 남짓 되는 회사 경력 때문에 늘 경력으로 인정되지 않아 연봉이 낮았고, 월급도 못 받거나 밀리거나 하는 일이 허다했다. 결국 5곳 중 3곳은 경영 악화로 회사가 사라져 버렸다. (그때 못 받은 월급이 아직도 있지만 묻어두기로...)
그때는 당장의 열악한 상황에 미처 알지 못했으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때 겪었던 다양한 디자인 경험은 지금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 내게 매우 유용한 경험이었다. 프리랜서로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는 내 미래 자산이었던 것이다. 처음 일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된 새내기 시절, 여러 업무를 처리할 때 특히나 디자이너로서 데이터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방법이라던지, 혼자서 전체 브랜딩을 리뉴얼하는 체계라던지. 내가 겪은 시간은 프리랜서에게 반드시 필요한 '관리'와 '넓은 시각'을 배우는 축적의 시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프리랜서로 승승장구하는 사람들도 많다. 다만 자신의 길을 나아가는 데 있어서 정답이 없듯이, 적어도 지금 회사를 다니고 있으나 프리랜서로의 전향을 꿈꾸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런데 확고한 무언가 보이지 않는 상태라면, 지금 하고 있는 회사 생활을 '축적의 시간'이라고 생각해 보길 권해본다. '어느 정도 그 시간이 축적되었을 때' 프리랜서를 시작해도 늦지 않다.
회사가 망하고, 겨우 새로운 회사로 옮겼지만 이번에는 월급이 밀리고. 나름 정직원이지만 프리랜서 못지않게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시기가 지속됐다. '디자인'에 대한 열망보다 당장 경제적 안정이 먼저였던 나는, 디자인의 열망은 가질 수 없지만 제법 안정적인, 복사인쇄를 주로 하는 회사에 디자이너로 입사했다. 디자인 일은 현저히 적었지만 제때제때 나오는 월급이 그나마 나를 불안감에서 건져내 주었다. 불안감이 사라지니 금세 마음속 고이 닫아두었던 디자인에 대한 열망이 다시금 솟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처음 '프리랜서'를 꿈꿨다. 그때부터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이런저런 '내가 할 수 있는 디자인 일'을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간간이 들어오는 디자인 외주 일을 받기도 하고, 디자인 소스 개발을 위해 시작했던 캘리그래피를 통해 엽서와 같은 상품을 만들어 블로그에 소소하게 판매를 해보기도 했다. 나만의 일을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일을 벌이기엔 내게 월급이 주는 안정감이 너무 컸기에,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나는 퇴근 후 새벽까지 다른 일을 병행했다. 육체적으로는 가장 피곤했던 시기였지만, 그 시간은 가장 열정적이기도 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앞서 이야기한 '축적의 시간'의 연장선의 개념으로, 조심스럽게 퇴근 후 시간을 활용해 보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소소한 재능으로 엽서 한 장 만들어 파는 일, 회사에서는 미처 하지 못했을 일들을 하나씩 해보며 가능성을 찾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다. 일례로, 나는 그 당시 겨우 엽서 몇 장을 만들어 팔아보며 평소 회사에서는 해볼 일 없던 인쇄 후가공 작업(은박, 금박)을 굳이 돈을 들여가며 이렇게 저렇게 해보기도 했다. 빛나는 은박, 금박처럼, 나도 마음만은 반짝반짝 빛나던 시기였다.
그렇게 앞서 퇴근 후 시간을 활용하며 나름대로 빛나는 시간을 찾아가던 중, 전에 다녔던 회사에서 우연히 내게 연락이 왔다. 혹시 출산 휴가를 떠나는 직원의 자리를 1년 간 대신해 채워줄 수 있겠냐는 제의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월급이 제때 나오긴 했던 그 회사가 사업을 정리하느라 퇴사해야만 하는 시기였고 나는 그 제의를 바로 수락했다.
1년짜리 계약직 자리였지만 나는 그 또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가장 규모 있는 회사였기에, 나는 그곳에서 조직 속에서 타 부서와 협업하는 방법, 그리고 체계적인 시스템 등을 덕분에 차근차근 배울 수 있었다. 오히려 기한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나중에 프리랜서로 홀로 나왔을 때를 대비하자'는 생각으로 '상사에게 보고하는 법' 또는 '디자인 시안을 피력하는 법', '상대와 일로써 협업해 나가는 법' 등을 터득해 나갔다. 프리랜서 시장에 나가기 위한 마지막 준비라고 생각하니 모든 순간이 소중했다.
여전히 퇴근 후 시간을 활용해 외주 일을 이어가는 생활을 지속했고, 계약직이 종료되는 시기에 다다르기 몇 달 전부터는 월급보다 부수입이 더 많아지는 시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몇 달간 눈에 띄게 보이는 수입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직장인에서 프리랜서로 전향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수입이 확실히 나를 살려줄 거라는 확신이 들었던 건 아니었다. 떠나려는 내게 또다시 정규직을 제안했고 순간 흔들렸지만, 내 가능성을 한 번 믿어보고 싶었다.
규모 있는 탄탄한,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사실 모든 회사에서의 조직 생활 경험은 프리랜서에게 크나큰 자산이 된다. '지금은 프리랜서로 나가기 위한 테스트장이다', '프리랜서라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여러 사람과의 협업은 어떻게 해나가는 걸까?' 등 시간을 축적하고 동시에 부수입의 변화를 천천히 느끼는 동안, 이러한 경험들을 겪을 수 있는 회사가 프리랜서로 발돋움하는 발판이라고 생각해 보면 회사 생활도 조금 달라질 수 있다.
회사가 아니면 쉽게 겪을 수 없는 소중한 경험들을 프리랜서로 가기 위한 마지막 준비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눈과 귀를 열어 일을 대하는 마음, 그리고 상대를 설득하는 마음을 빼곡히 담아내는 시간을 보내보기를, 단지 지나온 길을 보내본 사람으로서 마지막으로 권해본다.
프리랜서 디자이너의 첫걸음
: 회사 절대 그냥 나오지 마세요
1) 회사 생활을 축적의 시간이라고 생각하기
2) 퇴근 후 시간을 활용해 보기
3) 마지막 테스트 '장'이라고 생각하기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나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낸 유명한 디자이너는 아니다. 인지도도 없을뿐더러, 요즘 여기저기서 나오는 '월천 버는 디자이너' '눈감고도 수익이 일어나는'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니다. 자극적인 말들에 나 또한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만 따라오세요' 한다고 따라간다고 해서 다 그들처럼 된다면, 이 세상에 고민 없는 사람은 없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물론 그분들을 존경합니다)
비록 눈에 잘 띄진 않더라도, 나처럼 어딘가에서 이렇게 꾸준히 오래도록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이 가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글을 써 본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위치와 상황에 끝없이 방황하고 흔들리는 누군가가 있다면, 꼭 한번 이야기해주고 싶다. 천천히 가느라 아직 길이 안 보일 뿐, 당신도 충분히 가고 있는 거라고. 나도 이렇게 하고 있듯이, 당신도 할 수 있을 거라고 :)
아무튼,
이 시대의 모든 프리랜서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