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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Nov 26. 2024

산책이 나에게 알려준 것


얼마 전 반려견을 키우는 동네 주민과 함께 긴 시간을 함께 산책했다. 강아지와 30분 단위의 짧은 산책을 하루에 두어 번 하는 평소 루틴과 달리, 한 시간 반 가까이를 길게 걷는, 동네 한 바퀴를 크게 도는 산책이었다. 항상 호기심이 많은 나의 반려견은 종종 봐왔던 강아지 친구라 그런지 무척이나 반갑게 친구를 맞았다. 그런 환대에 응한 주민의 강아지는, '요새 산책 나가면 잘 안 걸으려고 한다'는 주인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아주 신나는 산책을 했다. 우리는 제법 쌀쌀한 바람에 코를 훌쩍이며 걷다가, 강아지 동반 출입이 가능한 카페에 들러 잠시 몸을 녹이기로 했다.


동네에서 사람을 사귄다는 건 내 인생에서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학창 시절 이후 처음이랄까? 초등학교를 제외하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모두 두 군데씩 옮겨 다녔던 내 인생에서 동네 친구 만들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유일하게 끊기지 않고 연락하고 지내는 동창이라곤 딱 한 명뿐.


결혼한 지 10년이 훌쩍 지났지만, 아이가 없는 나에겐 동네에서 누군가와 말을 섞을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작 몇 달에 한 번 가는 미용실에서, 마트에서 점원과 계산할 때 잠깐, 옆 호수에 사는 주민과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에 잠깐. 그뿐이다. 그러니까, 나에게 동네에서 사람을 사귄다는 건 그만큼 특별하다는 이야기다. 여전히 우리의 대화 주제는 강아지일 뿐이지만, 그래도 좋다. 내겐 분명 큰 변화다.


강아지와 산책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주변을 살피게 된다. 그러다 보면 산책하는 다른 강아지와 서로 인사를 하느라 주인분과 애매한(?) 인사를 하기도 하고, 지나가며 예뻐해 주시는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게 되기도 한다. 반려견이 없었을 때는 절대 하지 않았던 행동들. 하지만 이제는 먼저 인사를 하게 되는 일은 나에게 제법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동네 주민과 카페를 가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동네에서 생긴 소소한 일들 덕분에 내 삶은 한층 넓어졌다. 조금씩 넓어진 관계는 앞으로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어쩌면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말이다. 그저 산책 중 마주한 사람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게 되는 일처럼,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일이 관계의 시작임을 산책에서 다시금 배웠다. 그만큼 관계는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 말이다. 


동네 주민이 담아준, 산책 매트 위의 '나의 반려견'(그리고 나의 손)



관계가 일로 이어질 때


일에서도 다르지 않다. 특히 언제나 일을 의뢰 '받아야'하는 입장에 있는 프리랜서에겐 더더욱 중요하다. 그동안 나는 관계를 참 어려워하는 사람이었는데도, 그해 비해 프리랜서로 용케 10년을 잘 지내왔다. 어쩌면 초반에 높은 난도를 겪어서 그랬을까? 어쨌든 제법 대단한 일이다. 나의 첫 클라이언트는 '지인'이었다. 첫 지인과의 일은 또 다른 지인으로 연결되고 연결됐다. 그렇게 연결이 지속되며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왜 '지인은 함부로 소개하는 거 아니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만큼 나는 프리랜서 생활을 가장 난도 높게 시작했다. 그렇다면 지인 소개로 시작하는 일은 왜 어려운가? 바로 지인이기 때문에, 지인이어서 그렇다. 일이 아닌, 하다못해 '지인 부탁'이라도 한 번쯤 해본 사람들은 아마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덕분에 나는 혼란스러운 시간을 프리랜서 초기에 많이 겪었다. 그럼에도 중간에 그만두거나 하지 않았던 이유는 첫째는 생계였고, 둘째는 그럼에도 새로운 일들이 계속해서 연결되는 걸 몸소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못했던 적도 있지만, 그땐 그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때로는 클라이언트가 문을 닫고, 때로는 내가 마음을 닫았다. 그래도 그 당시에는 크게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일은 일이니까. '일만 잘하면 되지, 관계는 무슨'이라는 생각이 강했던 시절이었다. 관계 앞에서만 유독 서툴어 늘 조심스러운 나는 일에서만큼은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종종 냉정하기도 했다. '일은 일이다!'라고 마인드컨트롤을 수도 없이 했다.


연초부터 문 앞에 촘촘히, 그리고 시멘트까지 발라가며 차곡차곡 쌓아 올렸던 마음 앞의 벽을 하나씩 깨부수고 있다. 그리고 벽 앞에 굳게 닫혀있던 방화문을 힘껏 밀며, 조금씩 열어보는 연습을 해본다. 쾅 닫힌 방화문을 힘겹게 열 때마다 조금씩 벌어진 틈으로 빛이 들어온다. 공기가 흐르고 환기가 되니, 늘 어려워만 했던 클라이언트와의 관계가 조금은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프리랜서로 일하며 느꼈던 소통의 어려움. 산책이 내게 가르쳐준 건, 그저 내가 마음을 먼저 열면 된다는 단순한 진리였다.


일도, 디자인도, 그리고 프리랜서의 역할도, 결국 소통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임을 오랜 시간이 지나 이렇게 깨닫게 된다. 10년을 보내보니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프리랜서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자질 중 하나는 '관계에 대한 태도'라는 것. 기술적으로 조금 부족하더라도, 소통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있다. 그러나 소통이 부족하면,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더라도 일이 제대로 진행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 관계란 결국 서로 맞춰 걷는 것이다. 


문득, 이렇게나 닫힌 마음을 지녔던 프리랜서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일을 주었던, 지아온 모든 클라이언트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초창기 나의 서툴고 부족한 면을 이해받지 못했더라면, 분명 지금이 오지 못했을 거라는 걸 안다. 차곡차곡 쌓아온 인연, 그로 인한 경험의 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살다 보면 강아지 때문에 새로 만나게 되는 인연처럼 갑자기 찾아오는 관계도 있고,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계속 이어지는 오래된 관계도 있다. 일에서든 삶에서든 중요한 건, 그 모든 관계를 대하는 나의 태도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일을 대하고 있는지를 새로운 일을 접할 때마다 되새기고, 되새겨본다.


내가 지금껏 꾸준히 하고 있는 디자인, 이 일을 지속할 수 있게 해 준 클라이언트를 생각해 본다. 클라이언트가 잘 되어야 나 또한 잘 된다는 말은 아부가 아니라 진심이다. 나는 언제나 그 마음으로 클라이언트를 맞는다. 그리고 앞으로 새롭게 찾아올 클라이언트 역시, 같은 마음으로 기다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태도로 계속해서 앞으로도 이 일을 이어가고 싶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프리랜서 디자이너의 길, 이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더 풍요롭고 다채로운 디자인을 앞으로도 꾸준히 해나가고 싶다.


조금 뜬금없지만, 디자인 작업 중 찾았던 귀여운 말티즈 그림. [A Maltese on a Red Table Cloth (19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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