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이후 2년을 보내며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가장 처음으로 마음먹었던 건 바로 ‘내 손으로 책 만들기’였다. 책의 결과물을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만들어보기로 한 것이다. 기왕이면 디자인뿐만이 아니라 글도 직접 써보고 싶었다. 사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단행본 디자인 포트폴리오’를 위해서였다.
프리랜서로 독립한 후 주변을 돌아보니, 내 주변에는 출판사 인맥이 제법 있었다. 단행본 부서는 아니었지만 출판사에 다녔던 경력 때문이기도 하고, 나의 지인, 남편의 지인, 그 지인의 지인 등 몇 다리만 건너면 출판계에 몸담고 있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다시 말하면, 미래의 나의 클라이언트가 될 분들이 많았다는 것.
‘지인 찬스’라는 말은 마치 특혜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더 정확하고 날카롭다. 처음엔 지인 찬스로 얻어걸린다고 해도, 결국 일을 못하면 다음은 없다. 출판계에 뻗어 있는 인맥에 비해 정작 단행본 작업이 별로 없던 나에겐 그래서 더욱 예민하고 중요하게 여겨졌다.
다행히 프리랜서 초창기에는 지금처럼 일이 많은 편이 아니었던 터라 시간이 많았다. 단행본 디자인도 결국 크게 보면 내가 해오던 디자인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문제는 글감.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작가가 아닌 나에게 가장 쉬운 주제는 역시 ‘여행’이었다.
그 해에 다녀왔던 유럽 여행기를 글감으로 삼고 틈틈이 글을 써나갔다. 시간 순으로 써야 할지, 다녀온 장소별로 써야 할지. 시제는 진행형이 좋을지 과거형이 좋을지. 아무것도 정해진 것 없는 상태에서 나름대로 책의 꼴을 갖추기 위해 열심히 쓰고 다듬었다. 여행은 16년에 다녀왔는데... 글 다 쓰고 보니 18년도 더라.(글쓰기는 어렵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하는 현타가 올 때가 많았다. 어쨌든 고민 끝에 도전해보기로 하고 시작했지만 부족함이 자꾸만 보이는 것 같아서 말이다. 당연히 처음인데 완벽할 리가 없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스리고 또 다스리며 인쇄 직전의 단계까지 이르렀다. 문제는 그다음.
글과 디자인 작업은 그냥 나 혼자 했으니 인건비는 없는 셈 치고, 다 해놓고 인쇄 견적을 받고 보니 수백만 원에 달하는 제작비 앞에 갑자기 망설여졌다. 돈을 벌어도 시원찮을 판에 큰돈을 한 번에 써야 하다니. 또 한 번의 현타가 왔다.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작업이 끝나는 마지막까지 고민하게 될 줄이야.
결과적으로는 큰돈 들여 좋은 경험 했다 생각하기로 또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큰 결정(?)을 하는 만큼 곧 만들어질 책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그로 인해 약간의 도전이 되길 바라는 마음—무언가를 마음먹고 도전하기까지의 과정을 보고 나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기를—을 마지막 글인 에필로그에 눌러 담았다. 책은 여행 에세이 분류가 되겠지만, 스스로 이 도전을 하며 가장 많은 생각을 했던 건 에필로그의 내용이었다.
이 도전의 가장 마지막인 ‘출간’을 위한 절차는 출판사의 힘을 빌렸다. 내가 쓰고 디자인하고 만든 책이 온라인과 대형 서점에 유통되었다. 도전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책 만들기의 여파는 생각보다.. 무서웠다. ‘서적이나 회화 따위를 인쇄하여 세상에 내놓음’이라는 뜻인 ‘출간’이라는 단어의 위력이 이렇게 셀 줄 몰랐다. 졸지에 글을 전문 직업으로 삼는 ‘진짜 작가’들 틈에 나 또한 ‘작가’가 되어버렸다. ‘책을 직접 만들어 보자’는 디자이너의 생각으로 시작했던 지난날을 되돌아보니 괜히 부끄러웠다.
어떤 이들에겐 가볍게 읽기 좋고 디자인이 예쁜 책으로 기억되었지만, 어떤 이들에겐 여행 정보도 없고 자세한 내용이 담겨 있지 않은 일기장 수준의 책으로 기억되기도 했다. 기분 좋은 리뷰엔 나도 당연히 기분이 좋았지만, 그리 멘털이 좋지 못한 나는 정 반대의 리뷰엔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
나보다 훨씬 여행 경력이 많은 사람들에게 고작 몇 번 다녀온 게 전부 인, 게다가 한 달도 아닌 일주일 남짓 다녀온 여행기가 담긴 내 책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사실 나는 여행을 아직 한 번도 다녀오지 않았거나, 한 두 번 다녀온 게 전부이거나, 책으로 가볍게 여행하고 싶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주로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는데.. 근데 뭐 그게 내 마음대로 되나? 그럴 거였으면 출간을 하지 말았어야지.
아무튼 출간 직후부터 6개월 남짓까지는 스스로 혼돈의 시기를 보냈다. 디자이너인데 어딘가에선 작가로 부르고, 심지어 여행작가라고 까지 부르는 상황에 마치 발가벗겨진 기분까지 들었다. 다음 여행책은 언제 나오냐는 사람들의 말에 정작 책 출간 이후 한 번도 여행을 다녀오지 못한 나는 식은땀이 흘러내릴 지경이었다.
오락가락 반복되는 마음으로 지낸지도 벌써 2년이 흘렀다. 출간 직후인 작년부터는 일이 점점 더 들어왔다. 책 덕분이라고 믿고 싶다. 크고 작은 여러 일을 하고 있지만, 어쩌다 보니 지금은 단행본 디자인 작업이 나의 주 수입원이 되었다. 그리고 미팅 전 내 프로필을 살펴보다가 내가 만든 책을 보았다며, 다재다능한 디자이너를 만났다며 좋아하던 클라이언트와의 만남도 몇 번 있었다.
사실 책 판매 도로만 보면 내 책은 그리 좋은 성적은 아니다. 더구나 하루에도 수백 권씩 신간이 나오는데 2년이 지난 내 책은 옛날 책이 되어 사람들이 억지로 찾지 않는 이상 자연스럽게 보게 될 확률은 거의 없는 책이 되었으니까.
괜스레 부끄러운 나머지 어쩌다 아주 가끔 개인 sns에 내 책을 스스로 홍보하는 것 외에 별다른 건 하지 않는 일상. 목표했던 책 만들기는 달성했으니 나는 그저 열심히 내 할 일이나 잘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가끔 작업실 책장에 쌓여있는 책들을 보면 괜히 주눅이 들었다. 이렇게나 쌓아둘 걸 괜히 많이 만들었나 하면서.
그러다 얼마 전, 오랜만에 누군가 쓴 내 책의 리뷰를 보게 되었다. 내 책 리뷰는 정말 가뭄에 콩 나듯 보이는 거라 쉽게 찾을 수 있는데 내용을 대충 정리해보자면, 해외여행에 대한 로망이 없던 글쓴이는 내 책을 읽고 외국 공기 마셔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내 책이 여행 안내서라기 보단 어쩌면 ‘용기’에 관해 말해주고 있는 책이라고 느꼈다는 내용이었다.
책을 만들며 가장 많은 생각을 했던 부분을 정확하게 캐치당한 느낌이라 그랬을까, 술술 써 내려간 글의 내용은 순간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한 사람이라도 정확히 나의 속내를 알아준 것만 같아서. 사실 그래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그것도 아주 장황하게. 책을 만들며 속으로 의도했던 바를 그래도 단 한 사람이라도 알아주었으니 이 정도면 족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 거다.
누구에게나 진행 중인 무언가가 하나쯤은 있으리라 생각했다. 해보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 혹은 여행,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 설령 그것이 생각에서 그쳤건, 사느라 바빠서 중간에 멈춰 버렸건 간에, 내가 만든 이 책을, 글을 읽어내리는 동안 ‘나도….’ 하는 마음으로 혹시 그 ‘무언가’가 생각난다면, 적어도 이 기회에 도전해보는 마음이 생기길 바랐다.
여행에 정답은 없듯이 삶에도 정답은 없다고 믿는다. 여행을 통해 얻게 된 용기 덕분에 삶을 살아가는 태도가 조금은 유연해진 것 같다. 그것만으로도 왠지 한 단계 성장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유연해지지 않았더라면 전혀 겪지 못했을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을 마음에 품고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용기 있는 삶을 살아본다. __ 278p, 언제 가도 좋을 여행, 유럽
출간 이후... 특별히 달라진 건 없다. 프로필에 한 줄 이력을 더 채워 넣을 수는 있게 되었지만 글쎄, 지금 당장 프로필을 써서 어디 지원하거나 할 일이 있지 않는 이상 나에게 큰 변화가 생긴 건 아무래도 없는 것 같다. 대신 약간의 변화라고 하면, 일할 때 자신감은 좀 더 많이 붙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글도 꾸준히 노력해서 잘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
글을 업으로 삼는 작가분들이나 그와 관련된 모든 전문 종사자들이 혹시 나를 무지렁이로 볼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이번만큼은 내가 나에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길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처음 만들었던 책이 한 사람에게라도 통했으니, 다음엔 적어도 두 사람이라는 새로운 목표가 생긴 셈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