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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Mar 09. 2023

wherever, 어디든지

봄이 왔다


몇 주째 아웃풋만 나가고 있는 요즘. 인풋이 필요한데… 연초에 사둔 여러 권의 책 중 겨우 한 권을 완독 했고, 또 다른 책을 야금야금 안으로 채워 넣는다. 아침을 이렇게 시작해도 되나 싶지만, 그러지 않으면 일에 치여 마음이 황폐해질 것만 같으니까, 사치를 부려본다. 좋아하는 여행 책방에서 블라인드 북 형식으로 추천받은 책인데,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릴 때마다 장면이 그려진다. 시간이, 소리가, 맛이, 풍경이 느껴진다. 어쩐지 모르게 읽을수록 마음이 편안해진다.



툇마루에 정좌하고 쓰쿠바이에서 손을 씻어야지 하며 문을 연 순간, 눈이 부셔서 깜짝 놀랐다. 쓰쿠바이의 수면에서 빛이 춤추고 있었다.
졸졸졸….
물받이 끝에서 흘러내리던 물소리도, 오늘은 무척이나 부드럽게 들린다.
_계절에 따라 산다, 64p

* 쓰쿠바이つくばい : 툇마루 가까운 뜰이나 다실 입구에 설치한 손 씻는 물그릇; 또, 그것이 설치된 곳.

                    


‘쓰쿠바이’. 명칭도 이제야 알았네, 지난 2017년 교토 오하라에서.




얼마 전 미팅 자리에서 클라이언트와 이야기 중, ‘실장님은 여행 안 가세요? 코로나도 이제 많이 풀렸는데, 여행 좋아하시잖아요. 다음 여행지는 어디세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대표님과 딱 코로나 초창기 때 만났다. 그때부터 줄곧 일 이야기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때 여행 이야기에 내가 유독 반짝거리며 대화를 이어갔던 것 같다.


클라이언트 분은 올해 프로젝트가 끝이 나면, 오스트리아로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드넓은 자연 풍경 속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유유히 길을 걸어보는, 그런 여유로운 모습을 상상한다고 했다. 아, 오스트리아 너무 좋지. 지금 여행을 갈 수 있다면 어디로 가고 싶냐는 말에, 한 번씩은 갔던 여행지인 런던이나 프라하, 네덜란드에 오래 있어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타이트한 여행 말고 약간은 여유로운, 하루에 미술관 하나 가고 말아도 되는, 그런 일상적인 여행.



가끔 항공권을 검색해 본다. 당장 갈 것도, 갈 수도 없긴 하지만. 궁금하기도 하고, 그렇게 검색하다 보면 언젠가 또 실행에 옮길 수도 있지 않겠냐는 희망도 가져보며. 얼마 전 라디오 게스트 중 한 사람이 일본에 다녀왔다는 말을 듣고 도쿄 항공권을 검색해 봤다. 지금 상태로라면 그냥 당일치기로라도 갔다 오고 싶은 마음에 부리나케 검색을 했더니 왕복 50만 원은 족히 넘더라. 검색에 그쳤다.




가운데 있는 만주에 젓가락을 뻗었을 때였다.
“그럴 때는 말이지….”
선생님의 목소리가 나를 가로막았다.
“가운데 걸 남기는 거란다.”
“…네?”
“마지막 과자가 정중앙에 남아 있도록 다른 걸 잡으렴. 제일 가운데가 남아 있으면 마지막 손님에게 과자가 돌아갔을 때 ‘남은 것’을 먹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잖니?”
“….”
듣고 보니 그릇 한구석에 외따로이 놓여 있는 만주는, 아무리 봐도 ‘남은 물건’이다. 하지만 똑같은 마지막 하나라도 정중앙에 있으면 그릇까지도 다 마지막 사람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보인다.
고작 만주 하나인데도 놓인 위치에 따라서 의미까지 달라지는 것이다.
_계절에 따라 산다, 66p




코로나 이전 마지막 여행지는 도쿄였다. 시부야 한복판 크리스마스 루미나리에를 보러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겨갈 때 사람들의 질서 정연한 모습이 생각난다. 어떤 안내선조차 없었는데도 누구 하나 새치기하는 사람 없이 그저 앞사람만 발걸음 따라 졸졸졸 이동하던 시민들 모습. 국가적으로 반일감정이 여전한 건 사실이지만, 배려심이 몸에 배어있는 일본 사람들이 많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만주를 나눠 먹는 것에서부터 작은 배려를 나누는 사람들이라니.



2017년 가을, 오하라 산젠인에서.





코로나 이전 여행은 거의 대부분 약간 허술하지만 철저했던 여행이었다. 그러다가 코로나 이후 재작년과 작년, 무계획으로 갑작스럽게 제주 여행을 세 번이나 했다. 계획할 수 없을 만큼 현실을 열심히 살았다는 반증이기도. ‘무계획’이라는 단어조차 나에겐 두려운데, 결과는 생각보다 좋았다. 어쩌면 아마도 국내이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내 입에서 가장 여행다웠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때 그 여행의 여운이 제법 길다. 



책 속 장면을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다가 문득, 지난 교토 여행이 생각났다. 오래 묵어버린 듯한 클라우드 속 여행 폴더 사진첩을 뒤져보다가, 한참이나 사진 여행을 했다. 2018년엔 일본을 세 번이나 갔었구나.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해외로 여행을 가게 된다면 가장 가까운 나라로 먼저 여행을 떠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아마도, 일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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