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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Aug 13. 2024

프리랜서 디자이너, 인쇄소에서 배운 것

우직하게, 그렇게 계속

얼마 전 감리를 위해 인쇄소에 다녀왔다. 출판사 다니던 시절, 한 달에 한 번 인쇄소로 향하는 길은 나들이 가는 마냥 들뜨기만 했었는데. 프리랜서가 된 이후로는 그렇지만은 않다. 행여나 색감이 잘 나오지 않을까 봐, 최종 인쇄용 파일을 넘길 때까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오탈자 혹은 이미지가 나올까 봐 등등. 거기에 마냥 들뜨기만 할 수 없는 또 다른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회사에 소속되어 있을 때는 동료들과 함께 왔다면, 지금은 나를 고용한 클라이언트와 함께 동행한다는 것. 그래서 더더욱 긴장감을 놓칠 수 없다!


사실 프리랜서가 되고 9년을 일하면서 직접 인쇄감리를 다녀온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스무 번은 되려나? 의외로 인쇄감리까지 맡기는 클라이언트도 별로 없었거니와, 감리 자체를 안 보는 출판사도 허다했다. 단발성 인쇄물(홍보용 브로슈어, 리플릿 같은)이야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 클라이언트도 가지 않는 감리를 내가 먼저 나서서 갈 이유가 없었다. 


이번에 보는 인쇄감리는 프리랜서 생활 중 가장 큰 프로젝트 금액이었고 가장 오랜 기간이 걸린 작업이었던 인쇄 감리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사는 나와 클라이언트는 각자의 차를 가지고 파주로 향했다. 파주 출판단지를 지나, 인쇄소들이 몰려있는 곳, 그중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한 OO인쇄. 수십 개의 인쇄 기계가 돌아가는 시끄러운 소리 틈에 거의 소리 지르듯 담당자에게 통화를 하고, 안내받아 대기실에 자리를 잡았다. 


클라이언트와 인쇄소 대표님과는 오랜 인연을 이어오셨다고 했다. 덕분에 옆에서 그들의 근황 토크, 라테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었다. 적어도 10년 전, 15년 전 이야기에 맞장구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 그런지, 오랜만에 관련 종사자와 함께 두런두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특히나 인쇄 산업의 흥망성쇠를 들을 때면, 언젠가 나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생각이 많아진다.


고용주가 필요한 목적에 따라 금전적 지불을 통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용인에게 의뢰하는 것. 사실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는 심플하다. 클라이언트는 돈과 일을 주고, 나는 그 돈을 받고 일을 한다. 문장으로 이렇게나 깔끔한 일이 실제 상황에도 참 매끄럽기만 하면 좋을 텐데. 대부분이 그렇듯 매끄러운 실제도 있지만 복잡하디 복잡한 실제도 있는 법. 프리랜서 초창기엔 인쇄 감리가 그렇게 느껴졌다. 


인쇄 감리를 가려면 적게는 반나절, 많게는 하루를 꼬박 시간 투자를 해야 하는데 '내가 왜?'라는 생각이 강했다. '나는 프리랜서니까, 내가 움직이는 시간은 전부 돈으로 환산해야 한다'는 어쭙잖은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내 머릿속만 지배하기만 할 뿐, 실제 내 몸은 요청에 따라 인쇄 감리를 보고 있었다. (몇 번 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논 결과는 자연스럽게 클라이언트에 대한 불평으로 쌓였다. 


표지와 본문, 한 대수 한 대수 확인하며 기계 앞과 대기실을 왔다 갔다 하는 동안, 끝도 없이 펼쳐진 인쇄물 너머 제본된 인쇄물이 일정한 간격으로 줄지어 놓여 있는 컨베이어 벨트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여긴 회사 생활을 포함해 내가 가본 인쇄소 중 가장 큰 인쇄소다. 너무 궁금하다! 저게 뭘까! 


"대표님, 저 컨베이어 벨트 구경해도 되나요?" "아 저거요? 그럼 전체적으로 한번 쭉 보여드릴까요?" 호기심 가득한 말투에 담당자님은 친절히 인쇄소 곳곳을 다니며 하나씩 설명해 주셨다. 


윤전기(원통형의 판면과 압동을 서로 접촉 회전시켜 인쇄하는 기계, 인쇄기 중 가장 속도가 빠르다)는 처음이었다. 주로 단행본이나 브로슈어, 책자, 리플릿, 잡지 등 생각보다 소량 인쇄 작업만 해온 나로서는 이 거대한 기기 앞에 좀처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5미터는 돼 보이는 높이의 천장 끝까지 윤전인쇄용 롤지가 가득가득 채워져 있는 모습은 압도적이었다. 


"이 롤지를 여기에 끼우면, 앞뒤로 돌아가면서 1도씩 이렇게 인쇄가 되는 거예요. 예전엔 단면이었는데, 요즘엔 양면으로 이렇게 인쇄가 동시에 진행돼서 엄청 빨라졌어요. 인쇄가 끝나면 여기 바로 가스실, 위아래로 가스가 나와서 바로 종이를 말리는 거예요. 그래서 바로 제단, 접지까지 탁탁탁 돼서 이렇게 나오는데..."



클라이언트는 왜 그럴까에 대한 불평이 쌓이던 어느 날, "감리까지가 디자인이죠. 제가 가겠습니다."라며 감리를 먼저 제안했다는 디자이너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지막까지 책임지는 모습에 클라이언트 입장에서 신뢰가 안 갈 수 없었단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와, 저게 프로구나. 하기로 한 일, 끝까지 맡은 바 책임을 완벽하게 다하는 것. 프리랜서 3년 차 때의 일이다. 


'그때를 기점으로'라고 이야기하기엔 여전히 흔들릴 때가 많이 있었지만, 클라이언트와 꾸준히 일하며 흔들리는 상황이 올 때마다 나는 그 에피소드가 자주, 자연스럽게 생각난다. 일을 대하는 마음, 그보다 앞서 무엇보다 클라이언트를 대하는 마음 말이다. 비록 올해에 얼마큼 벌어야 가정을 꾸려가기에 충분한지를 매일 계산하고 고민해야 하는 생계 속에 살아가지만, 당장 하루만큼의 일당을 계산하고 비교하는 그 마음보다 한 발자국 좀 더 나아가 생각해 보는 것. 


"기장님 색감 너무 잘 뽑아주셨어요. 너무 고생 많으십니다. 잘 부탁드려요. 정말 감사합니다!"

"예, 당연히 잘해드려야죠. 늘 하던 일이니 걱정 마세요"

귀마개를 끼지 않으면 웬만하면 귀가 버텨낼 수 없을 정도로 하루 온종일 기계가 돌아가는 시끄러운 소리에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 가속화된 디지털 시대에 굵직한 인쇄소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고, 인쇄 부수는 점점 줄어들어 인쇄소가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하지만. 그들은 그저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몫을 다하고 있었다. 



당장의 마음보다는 그 이후를 생각하며, 그러니까 당장 내 아쉬움보다는 클라이언트의 마음을 조금 더 헤아려보자는 마음으로 어느덧 프리랜서 10년 차를 향해 달려간다. 그래도 그게 제법 통하긴 했는지 클라이언트의 소개로 소개로, 지금껏 일이 이어졌다. 정말... 통한 걸까? 그런데 이 '통함'은 과연 언제까지 유효할까? 자본주의 시장에서 이 마음이 언제까지 통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유효기간이 다 한 시기라면 이제 어쩌지. 이제 와서 칼같이 잘라내듯 다 돈으로 환산하면 되는 걸까? 그러면 기존 클라이언트들은 다 떠나가지 않을까? 


한동안 이런 생각들에 매몰되어 있었다. 힌트라도 얻고 싶은 마음에 요즘은 독서 모임에도 참여하고 있다. 물론 그런다고 짠! 하고 답이 바로 나오지 않을 거라는 건 안다. 한순간에 갑자기 변해서 영업을 너무나도 잘하는, 그래서 일감이 끊이지 않는 프리랜서 디자이너가 될 수도 있겠지만(과연 그럴 수 있긴 할까?) 그만큼은 바라지도 않는다. 프리랜서 3년 차 때 누군가의 이야기로 힌트를 얻었던 것처럼, 죽어가는 산업이라고 십수 년 전부터 평가되는 인쇄소에서 그저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처럼. 그러다 보면 또 다른 힌트를 찾을 수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심사본 3천 부지만, 최종 인쇄본 할 때 5만 부 찍으면 정말 좋겠다 그렇죠? 우리 목표였잖아" 

"아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꼭이요!" 


이번에는 수량이 적은 편에 속해 일반 옵셋인쇄로 찍지만, 올 가을 본인쇄에 들어갈 때는 아까 본 윤전인쇄로 찍어낼 예정이다. 웅장함에 보기만 해도 압도당할 것 같았던 윤전기에 일 년이 넘도록 붙들고 있던 디자인 결과물이 인쇄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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