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는 소통이 어렵다는 말
디자이너는 소통이 어렵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디자이너라 하면 대게 예술가적 기질이 어느 정도 잠재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걸까?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 양쪽 입장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게는 이런 식이다.
클라이언트: 서체를 다른 걸로 바꿔봤으면 좋겠는데 안된대요. 아니 내가 바꿔달라는데.
디자이너: 디자인적으로 이 서체가 딱인데, 밑도 끝도 없이 서체를 바꾸라는 게 말이 되나요?
다소 극단적인 상황이기도 하고 물론 아닌 경우도 있긴 하지만, 중요한 건 충분히 실제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회사에 다니는 상황이라면 싸우기(?)라도 할 수 있지만 프리랜서에게 그런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프리랜서 초창기에는 나 역시 비슷한 상황이 올 때면 위 예시와 같은 마음이었다. 디자이너 입장에서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무리한 요구를 하는 클라이언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는 그랬다. ‘디자인은 내가 전문가인데 뭘 알지도 못하면서’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회사에서처럼 싸울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실제로 그래본 적은 없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 나는 늘 화가 나 잔뜩 붉어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수정 작업을 하곤 했다. 사실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렇게 얼굴 붉어질 일이 아닐지도 모르는데, 그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소통’보다는 소위 ‘디자인 자존심’ 같은 것이 내 안에 가득 찼던 시기였다.
모든 일을 하나하나 직접 해야 하는 프리랜서는 분명 한 명이지만, 그 이상의 몫을 해내는 사람이기도 하다. 본업인 디자인도 해야 하지만, 때로는 견적 상담도 해야 하고, 필요에 따라 미팅도 해야 한다. 피드백 과정도 거쳐야 하고 직접 하진 않지만 적어도 인쇄, 제작, 납품, 그 이후의 상황을 전체적으로 컨트롤할 줄 알아야 한다. 프리랜서로 일하며 가장 힘들었던 게 무엇이었는지 만약 누군가 내게 물어본다면 나는 바로 ‘소통’이라고 답할 것이다.
되돌아 생각해 보면 나에게는 오히려 대부분의 많은 프리랜서가 손에 꼽는 ‘불안함’보다 훨씬 더 어려운 부분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소통’은 특히 ‘전화하기’와 ‘만나기‘ 그러니까 말로 이야기를 해야 하는 모든 상황을 말한다. 콜포비아까지는 아니지만, 실시간으로 일에 대한 피드백을 받고 무언가를 결정지어야 하는 당장의 순간이 내게 닥치는 그 상황이 힘들었다. 이 모든 걸 잘 정리해서, 일목요연하게 글로 표현하는 게 더 깔끔하다고 여겼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 생각할 시간 틈을 주는 게 나에게도, 클라이언트에게도 더 좋은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9년 전, 7년간의 회사 생활을 그만두고 내가 처음 프리랜서를 하겠다고 했을 때 남편은 옆에서 잘할 수 있을 거라며 나를 응원했다. 앞에서는 이렇게 응원을 하긴 했지만, 사실 남편은 걱정이 가득했단다. 일을 구해와야 하는 입장인 프리랜서에게 '연락'은 필수 요소인데 대체 일을 어떻게 구하려나 싶어서. 고정적인 일 하나 믿고 시작했던 프리랜서 생활 초창기에는 남편의 염려 덕분에(?) 한동안 내 대신 남편이 주변 사람을 통해 영업을 해올 지경이었다. 프리랜서 초창기 수입은 지금의 절반 정도이지만, 분명한 건 적어도 그 수입의 절반은 남편 지분(영업력)이나 다름없다.
일을 두고 고민하는 순간이 올 때마다 말보다 글이 편하다고 생각한 나와 달리, 남편은 글보다는 말이 정확하다며 나를 다그쳤다. 해결을 해야 하는 상황이 있으면 전화 통화를 해서 이야기를 직접 해보라고.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문장으로는 100% 전달되지 않는 법이라고. 이는 단어ᅠ하나하나를 신경 써서 메일을 쓰고 고치고를 반복하며 고심하는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다. “알겠어, 일단 글로 좀 적어보고…” 나는 말로 해서 한 번에 끝날 수도 있을법한 일을 일단 스스로 이해가능하도록 짧게 적고, 또 거기에 친절함과 전문성을 덧붙인 문장을 정리하고 다듬은 다음, 심호흡을ᅠ여러 번 한 후, 전화 통화하기를 몇 년 동안 지속했다. 1) 할 말을 순서대로 정리해서 2) 한번ᅠ읊조리며ᅠ예행연습을ᅠ한 후 3) 마치 지문을 보며ᅠ대화하듯 통화를 하는, 혼자서만 긴장감 넘치던 루틴.
그런데 이 루틴이 최근 2~3년 사이 거의 사라졌다. 연락을 자주 해야만 하는 상황에ᅠ어쩔 수 없이 놓이다 보니ᅠ체득하게 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무엇보다 직접 소통하며 부딪히다 보니 클라이언트와의 일에 있어서 소통이 가장 중요한 필수 요소라는 걸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이 모든 건 프리랜서 생활 중 가장 길고 큰 프로젝트였던 교과서 디자인 작업 덕분이다. 최소 1년에서 2년 반 가까이(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클라이언트와 밀접히 소통하게 되면서 나는 어느새 내가 먼저 안부를 묻고 끼니를 챙기는 사람이 되었다. “아직 식사 안 하셨죠? 끼니 거르시면 안 돼요. 제가 예전에 그러다 혼쭐난 적이 있잖아요. 피드백 천천히 주셔도 되니 꼭 식사부터 챙겨드세요”
꾸준한 소통의 훈련 덕분에 나는 같은 단어도 경우에 따라 서로 다르게 해석하기도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무리 문장에서 친절함과 나이스함을ᅠ신경 써서ᅠ전달한다고 해도 말로 직접 이야기했을 때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걸 느낀 것이다. 결코 말이 쉽다는 게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말로ᅠ구구절절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것들을 문장으로 전달하기 위해 글로 옮겨 적을 때 상당히 많은 부분을 축약하게 된다. 가령 '이 부분을 고딕체로ᅠ바꿔주세요'라는ᅠ단편적인 문장에는 '지금 서체는 자음 크기가 조금은 보기 부담스러워 보여서 아주 조금만 얌전했으면 좋겠는데… 이걸 어떻게 표현하지… 그냥 일반 고딕체로 바꾸면 해결되지ᅠ않을까' 하는 장황한 생각을 클라이언트가 아주 짧게 적은 문장일 수도 있는 것이다.
클라이언트가 써 내려간 문장 속 마침표 하나와 두 개, 세 개 차이에 따른 감정을 읽어내겠다고 한참을 들여다보고 고민하며 생각의 날개를 펼치던 지난날과 달리, 나는 요즘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든다. “대표님, 메일 주신 내용 잘 확인했습니다. 내용 중 몇 가지 확인하고 싶은 사항들이 있는데 혹시 통화 괜찮으실까요?” “대표님, 수정안 보내드렸습니다. 메일에 적어드리긴 했는데,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연락드렸어요” “팀장님, 혹시 지금 수정 요청을 주시기까지의 상황에 대한 설명을 제가 좀 더 들을 수 있을까요? 배경 상황을 알면 디자인 반영하는데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문장으로 한 번에 캐치하기 어려운 문제 상황들은 대부분 직접 이야기를 해보면 좀 더 파악이 잘 되고, 그러다 보면 문제를 해결하는데 훨씬 수월해진다. 클라이언트가 보내온 다소 생뚱맞은 레퍼런스 이미지에 당혹스러워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그 이미지를 찾게 된 과정을 들어보려 노력하는 것이다. “… 제가 찾아본다고 찾은 건데 디자이너가 아니다 보니 영 쉽지 않더라고요. 디자이너분들은 이미지도 착착 잘 찾던데… 이게 사실 어떻게 찾게 된 거냐면요…” 무형의 것을 유형의 것으로 만들어나가는 게 디자이너의 역할이라면, 클라이언트의 머릿속에서 아직 나오지 못한, 무형의 생각들을 잘 끄집어낼 수 있도록 돕는 것 또한 디자이너의 역할이다.
다른 디자이너들 직접 연락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길래 연락을 못했었어요.
실장님, 먼저 연락 줘서 고마워요
문득 대학에서 전공한 시각디자인의 영문명이 생각났다. ‘Visual Communication Design’. 그래, 맞아. 디자인에 소통(communication)은 필수지. 시각적으로 소통해서 디자인(설계)하는 것이 내 역할이. 소통 없는 디자인은 그저 작품일 뿐, 디자이너에게는 무엇보다 소통이 중요하다는 걸 프리랜서 10년 차가 다 되어가서야 완전히 깨닫는다. 왜 그땐 몰랐을까 싶다가도, 지난날들의 숱한 시행착오와 경험이 쌓여 지금 이렇게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뿌듯하다.
“그래도 나 이제 제법 연락 잘하지 않아? 내가 먼저 전화도ᅠ한다고”
“뭐 아직 그래도 더 필요하긴 하지만… 확실히 예전보단 나아졌어, 잘하고ᅠ있어”
내 프리랜서 초창기 영업 지분율 50%를 가지고 있는 남편이 아니었다면 분명 나는 이 프리랜서 생활을 오래 못했을 것이다. 중간중간 다그치긴 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옆에서 묵묵히 잘 지켜봐 준 남편의 응원에 힘입어 나는 오늘도 프리랜서 10년 차를 향해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