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의 글
참한 살림하는 주부의 꿈은 무슨, 오늘도 망아지 아들 하나에 헉헉대며 친정아버지 찬스 쓰느라 아이 하원하는 대로 낚아채서 친정집으로 달려갔습니다. 퍼질러 쉬다가 치맥 시켜서 사흘만에 또 세돌 아기에게 튀긴 닭안심 다섯개 쥐어주고 아버지랑 이런 저런 얘기 나누는데, 어린이집에서 낮잠 건너뛴 아들램이 발악을 하며 엉엉 울길래 한바탕 난리 치른 후 집에 왔어요.
지금은 주차장 - 4층까지 애 안고 올라갈 것이 까마득해 숨 돌리고 있네요. 아까 아버지랑 나눈 몇마디 말 때문에 엄마 생각이 계속 맴돌아요. 아버지는 엄마 돌아가신 후 두 번의 이사를 하시면서 이제 엄마 짐을 99% 다 정리하셨어요. 오늘은 어느 짐에서 찾으셨는지 엄마가 마지막까지 열쇠고리에 달고 다니던 금속방울을 찾았다며 저를 주시네요. "이거 네가 가질래?"
이런 때마다 제 마음이 많이 애틋합니다. 저는 우리 애 가지고 놀으라고 준다며 방울을 챙겨왔습니다. 넓고 깊은 아줌마용 숄더백 안에서 핸드폰이나 집 키 찾는 건 정말 어렵다며 늘 긴 끈과 소리나는 방울을 달아두시던 엄마 모습이 떠올랐어요. 세월이, 우리 삶이, 조금씩 엄마의 흔적을 털어내고 있지만 이렇게 구석구석 남아있는 조각들은 평생동안 조금씩 조금씩 어디선가 흘러나오며 엄마를 일깨워주겠지요.
몇 장면이 떠오릅니다. 한참 아버지가 많이 바쁘실 때, 어느날 퇴근길에 산처럼 커다란 빨간 장미 꽃다발을 사서 들어오시며 엄마에게 "여보 축하해, 00이사 마누라 된거, 그동안 고생 많았어" 라고 로맨틱하게 승진 소식을 알려주시던 모습. 후에 안 일이지만 해외 채용으로 입사하셨던 아버지는 줄도 빽도 인맥도 없어서 연차를 다 채우고 동기들 중 마지막으로 승진하신 거라고 했어요. 제 기억에도 부서 옮기신 것만 몇번이고 지방발령도 있었으니... 그 해에도 승진이 아니면 영원히 물러나는 길만 남아있었다는데 엄마 마음졸임도 어지간 하셨겠죠.
저 대학 들어가기 전 아버지와 엄마와 셋이 일주일 여행을 했던 적이 있는데, 그 때 놀라울 정도로 새삼스런 부모님의 모습을 많이 보았어요. 자녀들 앞에서 참 평화 유지를 잘 해오셨는데 (언성 높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24시간을 같이 있어보니 왜 이리 많이 다투시는지. 계획대로 시행되어야만 성에 차는 아버지와, 여유있게 아기자기한 구경을 하고 싶어하시는 엄마... 저희는 여행지에서 늘 일렬로 걸어다녔답니다. 맨 앞에 성미 급한 아버지, 가운데 어쩔 줄 모르는 저, 맨 뒤에 맘 상해서 일부러 느즈막히 이것저것 구경하며 걸어오시던 엄마.
아버지가 일 때문에 부득이하게 한국을 한참 떠나계시던 때, 저와 동생이 일년 반 만에 아버지를 만나러 갈 수 있게 되었을 때, 너희들 오는 것 기다리면서 아빠가 손수 크리스마스 트리와 오너먼트를 하나하나 매달면서 기다리고 계시다고 눈물을 글썽이며 이야기하던 엄마. 엄마가 아프게 된 사실을 숨긴 채 미국에 제 졸업식에 홀로 오셔서 저 이삿짐 싸는 걸 돌아보시며 몇 번이나 아버지가 하시던 말씀 "엄마가 네 졸업식 참 보고싶어 했는데, 정말 보고싶어 했는데."
엄마 장례 기간에 입관하기 전 마지막 인사 나누라는 상조아저씨 말에 처음으로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며 아버지가 부르짖던 말, "여보, 정말 많이 사랑했소, 앞으로도 계속 사랑할거요." 이건 제 가슴 속에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순간이에요. 지금도 생각하면 자동으로 눈물이 (2024년 현재도 동일)
아버지는 그간 해마다 너댓번 정도 엄마를 보낸 곳을 찾으셨어요 (저희는 엄마를 화장해서 뿌렸답니다) 그리고 올해도 동생네 부부와 다 같이 한번 다녀오려는데 서로 날짜가 잘 안 맞더라구요. 일정을 상의하다가 아버지가 문득 말씀하시네요. "이제 일년에 두어 번만 다녀오려고." "그쵸? 거기도 이제 많이 변했어요 풀도 많이 자라고 주변에 개발도 많이 되고." "그래, 그리고 이제 5년 지나기도 했고. 거기 자주 찾아가는 게 뭐 그리 큰 의미가 있겠니, 이렇게 엄마는 내 가슴속에 항상 살아있는데."
웃으시는데 아버지 눈이 빨개지셔서 저는 차마 아버지 얼굴은 못 보고 온 집안 싸지르고 다니는 망아지만 끌어다가 기저귀를 갈았습니다. 언젠가 남편이 그런 말을 했어요, 이렇게 평생 마주보고 머리 맞대고 이야기 나누며 살고 있다가 어느 날 한순간에 당신이란 사람이 없어진 것 아니냐, 그것도 사이가 그렇게 좋으셨다면서, 본인은 그 상실감이 감히 상상조차 안된다고.
상담 선생님이 가끔 얘기하세요. 온 가족이 그렇게 슬픔을 눌러담지만 말고 언젠가 한번쯤 다 같이 꺼내놓고 같이 슬퍼하고 같이 다독이고 하라고, 서로 알면서 모른척 참지 말라고. 그런데 오늘도 저는 차마 못하겠더라고요, 남편이나 다른 식구들이 더 있었으면 모를까 (생판 남이 있으면 평정심 유지에 도움이 됨) 아직은 도저히 그 슬픔을 같이 꺼내볼 자신이 안 생기더라구요.
엄마 방울 열쇠고리 하나에도 깃든 추억이 새록새록한 날입니다. 이불빨래 걷으러 옥상 올라가보니 보송보송 잘 마른 이불과 더불어 오늘은 황사가 없는지 예쁜 달님과 별님이 열댓 개는 보여요! 서울 하늘에서 이런 장면도 오랫만에 본다 싶네요.
이삿짐 중 친정에서 넘어온 박스 열댓개의 절반은 아버지가 버리지 못하고 저에게 보낸 엄마의 마지막 흔적들입니다. 메모, 일기, 사진, 온갖 소품들 등... 상자 열고 정리할 때마다 매번 오늘처럼 이러겠지요, 어제는 기억나지 않던 것이 오늘은 기억나고 하면서 더 울었다 덜 울었다 웃기도 했다 그러겠지요. 그래도 저 상자들을 다 치울 때 쯤에는 슬픔의 파도에도 제가 좀 더 익숙해지고 파도에 몸을 싣는 법도 조금 더 익히게 되리라고 믿어봅니다.
오래 전 비공개 커뮤니티에 작성했던 글을 다듬어 옮겨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