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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아이와 단둘이, 1년 6개월의 캐나다 밴쿠버 -3

by 마음씨

2022년 12월 20일, 폭설이 쏟아진 밴쿠버 공항에 내린 기억이 벌써 2년 전이다. 그 해 여름 다소 충동적으로 캐나다 이사를 결정한 후 4개월만에 나와 아이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출국했고, 배우자는 짧은 주기로 한국과 캐나다를 오가다가 지난 여름 드디어 완전히 밴쿠버로 입국했다. 우리가 떨어져 지낸 기간은 꽉 채워 1년 반. 그 18개월 동안 많이도 질문을 받았다, "어떻게 그렇게 하셨어요? 어떻게 하면 돼요?"


각 개인이나 가족마다 주어진 조건과 환경이 천차만별이라 정해진 답은 없다. 4개월 정도 세 식구가 완전히 붙어 지냈는데, 모처럼 배우자만 한국에 가 있게 되자 (그래봤자 2주) 처음에 아이와 둘이 정착하던 시기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그래서 기억이 아쉽게 더 희미해지기 전에 회고 겸 기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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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1년 반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매일 매일 사건이 벌어졌는데, 너무 많은 일들이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나다 보니 - 이제 지나고 돌아보면서는 딱히 큰 일도 아니고 고만고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사는 게 다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충돌로 가득했던 첫 학기, 필요한 시간이었다

많은 분들이 9월 새 학년 시작에 합류하는 걸 추천해 주셨다. 하지만 우리는 타임라인이 그렇지 못했다. 밴쿠버 사계절 중 가장 어둡고 추운 12월 말 흔치 않게 꽁꽁 얼어버린 공항에 내렸고, 아이는 새해가 되자마자 등교를 시작했다. 첫날 아는 친구 하나 없는 아이가 잠깐이지만 운동장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을 학교 담장 밖에서 몰래 지켜보던 심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학교가 넓고 놀 시간이 많다며 좋아한 것은 딱 일주일, 고학년이 되어 만난 동급생들은 결코 친절하지도 호락호락하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일찍부터 체력을 키워 운동실력도 좋았다. 울거나 흥분하면 바로 놀림감이 되어버렸다. 아이는 매일 눈물 바람으로 집에 돌아왔다. 나는 개입하고 싶은 마음을 움켜쥐고 반복해서 알려주었다: 큰 소리로 항의하고,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아이는 '같이 어울리고 싶은 좋은 친구'와 '사람을 휘두르고 함부로 대하는 동급생'을 구분하느라 꽤나 고생했다. 대개 타인에게 횡포를 부리는 아이가 당장의 또래 집단에서는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는 학교를 떠날 때까지 완전히 극복하진 못했다. 하지만 1년 반에 걸쳐 차츰 균형을 찾아가는 아이를 보며, 이러한 일들을 지금 겪은 게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딱 한번 개입했던 문제가 있었다. 동네 친구도 생기고 길도 익힐 겸 스쿨버스를 태웠는데, 늘 부딪히는 동급생 한 명이 급기야 다른 형들과 함께 아이에게 심하게 물리력을 행사하는 일이 '버스 안에서 하교 중에' 발생했다. 학교 운동장이나 교실과 달리 버스 이동 중에 생기는 사고는 어른의 중재나 도움 요청이 불가능한,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나는 곧바로 교장, 교감, 담임 선생님에게 메일을 보냈고 중재 뿐 아니라 전체 아이들을 대상으로 교육도 요구했다. 빠른 조치가 없으면 당장 교육청에 쳐들어갈 준비도 했었다. 다행히 학급 내에서는 아이와 해당 학생이 당장 분리되었고, 교감 선생님이 상황 정리와 사과 조치까지 현명하게 진행해 주셨다. 아이는 그동안 마음에 담고만 있던 억울함을 해당 학생에게 직접 말할 수 있었다고 했다.


놀랍게도 상대 학생은 아이의 솔직한 분노에 몹시 당황했고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 시간이 흘러 묵은 감정이 희석된 둘은 이듬해 일년간 제법 사이좋은 친구로 지냈다. 끝없이 악화되던 관계가 믿을만한 어른의 도움을 받아 긍정적으로 전환된 것이 아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듯 했다. 반드시 행동해야 하는 일들이 있고, 걱정과는 다른 결말이 있을 수 있다는 경험이 하나 생겨 다행이었다.


안착하긴 이르다, 변화를 선택한 세번째 학기

처음에는 아이가 배우기 원하는 언어가 있어 집 근처가 아닌, 다소 거리가 떨어진 학교를 다녔다. 아이의 적응은 조금 더 쉽고 빨랐을지 모르지만 통학 시간의 제약은 나에게 도저히 풀 수 없는 일상의 부담이었다. 여기에 세컨더리 진학이 다른 걱정거리로 따라왔다.


청소년기의 한복판으로 접어들수록 동네 친구들과의 '몰려다님'이 중요해질텐데, 먼 거리 학교는 모든 친구들과의 상호작용에 부모가 개입할 수 밖에 없었다. 같이 농구 한번 하려 해도 대중교통이든 자차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게 서로 얼마나 번거로운가.


내가 모르는 아이의 세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아이의 시공간에서 분리되어야 했다. 이 마음을 굳힌 뒤부터 겨우 첫 학교에 적응한 아이에게 '동네 학교로 옮기자' 를 시전했다.


아이가 집에서 3분 거리에 있는 학교로 옮겨도 좋다고 대답하기까지 꼬박 일년 하고도 삼개월 정도가 걸렸다. 하교 후 늘상 나가 놀던 놀이터가 바로 그 동네 학교 놀이터였고, 그 학교 학생도 아니면서 위아래 학년 친구들이 많아진 덕분이었다.


아이와 합의가 이루어진 게 봄방학 직전이었기에 나는 번개같이 온갖 서류를 준비해 교육청으로 달려갔다. 누락된 서류들이 있긴 했어도 잔머리를 굴려 그 자리에서 모두 해결했다. 아직 한국에 있던 남편의 동의가 필요했는데 어차피 내가 남편 계정에서 회신할 거라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운 좋으면 봄방학 직후 옮길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두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기다리다 못해 전화해본 교육청 오피스에서 들은 답변은 '아이 아버지 동의 없음' 으로 보류된 상태. 알고 보니 이메일 발신자 이름이 서류상 남편의 이름과 100% 일치하지 않아 남편의 회신은 매칭 케이스 없음, 아이의 케이스는 부모 미동의 건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부랴부랴 이메일 발신자명을 수정하고, 다시 답변을 보내고, 교육청이 수신한 걸 확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렇게 금방!) 새 학년 새 학교의 환영 메일이 도착했다.


실컷 놀고 먹고 온갖 야외 활동 프로그램을 돌아다녔던 첫 여름방학에 비해, 두번째 여름방학은 낯선 학교로의 전학 준비로 영어 읽고 쓰는 연습에 제법 돈과 시간을 쏟았다. 다행히 캐나다의 첫 학기에 여기 저기 부딪혀 괴로워하던 아이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첫 학교에서 아이가 꽤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그리고 - 그럼에도 오래 걸려 천천히 동네 학교로 옮기게 된 것이 너무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적절한 시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살다보면 결국 이렇게 될 거였나 싶은 일들을 만난다. 때로는 금방 깨닫기도 하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경우도 많다.


여기 와서 내 일상보다는 아이의 매일을 지켜보며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한다. 불안했고 어려웠고 기쁨과 고통을 수없이 반복했던, 하늘이 무너지는 듯 하다가 한없이 하찮기도 했던, 갈피를 잡을 수 없던 아이의 시간들이 차곡 차곡 쌓여 오늘의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이는 그저 그렇게 성장하는 중이고, 그 모습을 보며 가장 많이 감동하고 배우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1년 6개월을 돌아보는 글을 쓰려 했는데, 마무리 시점에 밴쿠버살이 2년을 꼬박 채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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