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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단뱀클럽 Nov 12. 2017

이태원은 부동산도 감성적이다

11년 동안 연락만 하고 지냈던 친구를 만났다. 웃긴 이야기지만 11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연락은 했다. 어느 날 문득 “서른 전에 한번 보자”라는 생각으로 그 친구에게 다가갔고, 우리는 이태원 해방촌에서 만나기로 했다. 약속 날짜는 11월 11일.


만나는 날도 어김없이 일을 해서 서둘러야 했다. ‘조금 늦을 것 같다’고 연락하자 ‘괜찮다’며 답변하는 그녀의 말에 안도했다. 지하철에서 내리고 늦을까 싶어 택시를 찾았다. 그 많던 택시들이 어디로 갔는지 눈을 좌우로 굴리면서 앞으로 걷다, 뒤로 걸어가기를 반복했다. 아침에 닦았던 구두가 더러워 보일까 봐 내내 허벅지에 구두 끝을 비비면서 걸어 올라갔다.      


큰길로 나와 택시에 올라탔다. 길을 잘 모르는 곳이라 내비게이션을 켜고 택시기사와 가벼운 소통을 했다. 이어폰을 오른쪽만 꽂고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들었다. 노래를 반 정도 들었을 즈음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해 기다리는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큰 키를 가졌다. 긴 머리는 투박하게 늘어놨고, 반듯한 눈썹이 저녁 하늘이 고인 큰 눈을 고정해 주는 듯했다. 유난히 반듯한 눈썹에 ‘미술을 해서인가’라며 물음표를 머리에 띄우기도 했다. 조그마한 손도 눈에 들어왔다. 곧장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바가 있고 술 종류가 많은 음식점에 들어갔다. 그녀가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기도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좋은 자리를 찾았다. 처음 방문하는 곳에 술자리를 찾는다면 바에 앉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가 앉은 테이블만큼은 낯선 공간을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서 중간쯤 위치한 테이블에 앉았다. 술은 맥주, 식사는 닭고기와 와규를 시켰다.     


긴 코트를 풀어헤친 그녀는 오랜 운동으로 다져진 건강한 몸매를 갖고 있다. 선명한 목소리를 가졌지만 말수가 적고, 표정 변화도 적었다. 수줍음이 많은 편인 것 같기도 하다.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은 성격도 시원하고 활발하다고 확신해 왔는데 그런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 반면 종잡을 수 없어서 생경했다. 가끔 대화하면서 느끼는 표정 변화와 무질서한 손짓이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기이한 쾌감도 있었다. 특히 대화 상대의 몸짓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에 편안함이 느껴졌다.


한껏 식사 즐긴 뒤, 해방촌을 걸었다. 다음 종착지를 찾기 위해서다. 길을 걸으면서 조금은 초조했다. 미리 찾아둔 곳이 있었지만 문을 닫았다. 식사 계산도 그녀가 한 탓에 추운 날씨지만 손에 땀이 났다. 제법 괜찮은 장소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 눈 돌리기 바빴다. 길을 걷는 동안 내내 차도 쪽으로 걸으려 하는 그녀가 신경 쓰였다. 다만 누군가가 내 왼쪽에서 걷는다는 것을 싫어하지 않아 마음은 편했다.     


이태원 언덕을 넘고, 유명한 꽃집도 지나쳤다. 수수해 보이는 부동산 간판도 보였는데 “이태원은 부동산 간판도 감성적이다”면서 코웃음 쳤다. 언덕을 내려와 큰길로 향했다. 길을 건너 이태원 남쪽 길을 걸었다. 가까운 곳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머리 한 구석에 자리했다. 멀리서 보이는 샴페인 바에 들어갔고, 다시 테이블에 앉았다. 


익숙한 샴페인 하나를 주문했다. 샴페인이 가진 이야기를 나눠주며 어깨가 으쓱했다. 이번 안주는 감자튀김이다. 몇 잔 기울이면서 어색한 분위기는 조금 가셨다. 곧장 외국 생활에서 겪었던 여러 모험담을 늘어놨다. 예술을 동경하기에 여러 미술 이야기도 주고받았다. 그녀는 미술에 조예가 깊다. 대화 도중 나눴던 첨예한 몇몇 지적들은 내가 알던 지식의 순서를 재조합하기에 충분했다.


한 병을 다 비우고 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길을 걸었다. 집에 가기 위한 수단을 찾아 큰길로 나섰다. 제법 쌀쌀한 날씨를 이겨내기 위해 그녀가 준비해온 가죽 장갑이 눈에 들어왔을 즈음 택시가 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인사를 주고받았다. 택시가 출발하자 눈을 깜박이며 바라봤다. 각자 귀로에 선 나 또한 택시를 타기 위해 대로변을 내려갔다. 어느 정도 지났을 즈음 비가 왔다.     


비는 쏟아지듯 내렸다.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달려갔다. 젖는 머리도, 옷도, 구두에 들어오는 물도 익숙하지 않지만 이상하게 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신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세찬 빗속을 춤추듯 뛰었다. 저 멀리 택시가 보였다. 걸인이 술이 덜 깬 듯한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택시에 탔다. 흠뻑 젖은 채 택시 창문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봤다. 빗물 넘어 풍경도 눈에 가득찼다. 이어폰을 오른쪽 귀에도 꽂고 왼쪽도 마저 꼽았다. 노래를 들으며 창밖을 다시 보았다. 나름 괜찮은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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