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요즘 수요일 저녁을 기다린다. 수요일을 제외한 저녁엔 대부분 시키지 않아도 야근을 하며, 굳이 가장 늦게 텅 빈 사무실을 나와야 성실한 직장인으로서 하루를 무사히 마쳤다고 안도하는 그다. 하지만 수요일 저녁만큼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정시 퇴근을 하고, 한 달 전 가입한 독서 토론 모임을 가기 위해 강남역 근처 카페로 간다.
그는 조금 서둘러야 한다. 판교에서 요즘 가장 잘 나가는 벤처회사 대리인 그를 제외한 모임 회원 3명은 모두 강남역 근처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긴 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늘 깨끗한 흰색 셔츠만 입는 A는 역삼동 작은 특허사무소에서 경리일을 하는 여자다. 지방의 한 상업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취업한 그녀는 몇 번 회사를 옮겼다고 했다. 20대 중반으로 가장 어린데, 그 연령대의 여성이 가진 보편적인 발랄함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그녀는 수줍음이 많고, 말수가 적다. 그녀가 가끔씩 하는 말은 그나마도 주로 독서토론 모임의 맥을 끊기 일쑤다. 매끈하게 다져진 몸매와 긴 다리를 가졌는데, 제법 큰 손으로 물건을 투박하게 만지는 버릇도 있다. 카페에서 모이는데도 불구하고 매번 이름 모를 커피를 들고 나타나기도 한다.
한편 그가 수요일 저녁을 기다리는 진짜 이유이자, 그가 사랑에 빠진 B는 약사다. 하얀 가운이 누구보다 잘 어울릴 것 같은 그녀의 밝은 미소와 다정한 말투는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듯 자연스럽다. 매주 수요일마다 그녀는 패션쇼를 선보인다. 한없이 청순해 보이는 옷차림에서 귀여운 옷차림, 때로는 섹시하기도 한 옷차림까지 다채로운 패션 스타일이 전부 너무나 완벽하다. 그는 모든 옷이 그녀를 위해 태어난 게 아닐까라는 망상을 하곤 했다. 지난주 독서 토론 모임을 마치고 가진 회식 때는 그녀가 세련된 애교를 부리는 모습도 봤다. 그때 그는 비로소 신붓감으로 완벽한 여자를 찾았다고 확신했다.
마지막은 이 독서 토론 모임을 처음 만든 남자이자, 내 라이벌인 무역회사 대리 C다. 높은 연봉에,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국내 최고의 무역회사에서 중국 통으로 잘 나가는 C는 진하게 생긴 외모만큼 호방한 성격을 갖고 있다. 남자답고 카리스마가 있으며 대화를 주도하는 편이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나도 질세라 한 마디씩 하는 게 습관이 돼서 이제 수요일엔 아침부터 밥을 든든히 챙겨 먹고 나온다.
7시 30분이 됐다. 일주일 만에 다시 이곳 강남역 카페에 넷이 둘러앉았다.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 그는 오늘따라 더 매끄럽게 머리를 넘긴 C를 주시한다. 그가 큰 목소리로 주문을 주도하기에 앞서 선수를 치기로 한다. 자리에 앉았고, 정신없이 두 시간이 흘렀다. 오늘따라 더 사랑스럽게 입고 온 B와 자주 눈을 맞췄고, C의 공세에 적극적으로 맞섰다. 최근 중국 새로운 거래처와의 계약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무용담에서 잠깐 기세에 밀린 듯했으나 적당히 외면하며 최근 내가 썼던 훌륭한 기획서를 매력적으로 스토리텔링 했다. 보이지 않았지만 엎치락뒤치락하는 오늘의 그 자리에서도 A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몇 마디 말로 맥을 끊었고, 자꾸 시계를 봤다.
모임이 끝났고 오늘은 뒤풀이 없이 모두 흩어졌다. 그는 B와 가까워졌고, B에게 매력을 한층 더 어필한 만족스러운 수요일이었다고 되새기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바로 지하철을 타면 이 기분을 빨리 놓칠 것 같아 강남 근처를 조금 걸었다. 그리고 조용한 골목 전봇대에 기대서 잠시 담배를 피웠다. 그런데 저기 가로등 밑 그림자에서 키스를 하고 있는 두 연인이 포착됐다. 그 둘은 진하게 키스를 하더니, 이내 옆에 있는 모텔로 웃으며 들어갔다. 그런데 가로등에 비친 얼굴이 낯익었다. 그는 한참 입을 벌리고 꼼짝 하지 않은 채 모텔 입구로 사라지는 그들을 바라봤다. 'A와 B가 저렇게 잘 어울릴 수 있다니'라는 생각을 했다.
필립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