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의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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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제자리에, 준비…… 출발!
어린 나는 달리기가 죽도록 싫었다. 속도가 느려서 꺼려하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심리적인 부담 때문이었다. 시작하기 전에 잔뜩 긴장하게 되는 기분이 유독 버겁게 다가왔다. 출발선에 친구들이 나란히 서고, 저 멀리 보이는 선생님의 깃발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내겐 벅찬 일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보다는 기분 나쁘게 간질거렸다. 심장을 꺼낼 수만 있다면 당장 꺼내서 손으로 벅벅 긁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눈 한 번 깜빡이는 것조차 불안한 순간.
"깃발이 언제 내려갈까, 호루라기 소리가 잘 들리긴 할까? 지금 내 발이 출발선 금을 밟고 있진 않을까? 옆 친구들보다 늦게 출발하면 어떡하지?"
여러 생각들이 짧은 시간 동안 나를 옥죄어 왔다. 아마 내 심박수는 뛰는 순간보다 시작 전 찰나의 순간이 가장 높았을 것이다. 고작 몇 초에 모든 것이 걸려있는 사실이 미웠다.
내게 시작은 늘 조심스럽다. 머릿속으로 세우는 새로운 계획만 수백 가지. 이 중에서 실제로 시작에 옮긴 건 손에 꼽을 만큼 적다. 뭐든 벼락치기로 일을 해결할 정도로 미루기가 일상인 내가, 유독 새 출발을 하려고만 하면 완벽주의 성향이 튀어나온다. 평소엔 잘만 숨어있다가도, 일단 해보자는 마음으로 일어서는 순간 슬그머니 나와 덥석 발목을 잡는다.
그렇다고 해서 의지가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의지와 열정은 넘쳐나서, 초기 계획 하나는 늘 완벽하게 세운다. 문제는 거기서 멈춘다는 것이다. 일단 해보자는 마음으로 일어섰다가도 이내 다시 제자리에 눌러앉게 된다. 마치 내 안의 누군가가 “지금은 때가 아니야.”라고 속삭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럼에도 이상하게, 나는 매번 그 시작을 완전히 피하지는 않는다. 미루고 미루다 결국 벼랑 끝에 몰리면, 오히려 마음을 굳게 먹고 시작하게 된다. 겁이 많고 걱정도 많아 쉽게 주저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늘 "이번엔 잘 될지도 몰라."라는 희미한 기대가 피어난다.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수없이 미루고 망설이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간다. 그걸 보고 있으면 조급함이 불쑥 고개를 들어 절로 마음을 다잡게 된다. 내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시간만 흐르는 게, 무작정 출발했다가 넘어지는 것보다 더 두렵기 때문이다.
막상 출발선에서 발을 떼고 나면, 생각보다 별거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처음엔 온 신경이 곤두서서 "넘어지면 어떡하지?"를 되뇌며 달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의문은 자연스레 흐릿해져 갔다. 시작은 거창할 필요가 없다. 계획이 완벽하지 않아도, 중요한 건 얼마나 잘하는가 보다, 지치지 않고 꾸준히 할 수 있는 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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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시작이 두렵다. 하지만 두려워하면서도 계속 시작하고, 또 도전한다. 멈춰 있는 나보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내가 좋아서 무서워도 눈 한 번 질끈 감고 발을 내딛는다. 완벽한 첫걸음이 아니어도 괜찮다. 숨 막히게 달리다 보면 어떻게든 결승선을 마주하는 것처럼, 새로운 시작도 묵묵히 걸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에 맞는 결과를 얻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