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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나부인 Jan 17. 2020

우리 그리고 까미노 - 하루 더 생장, 이제 내일

평행하게 걷기

아침이 밝아왔다. 정확히는 새벽이 밝았다.

길을 떠나는 이들의 채비 준비로 일찍부터 알베르게가 부산하다.

1층 주방에 앉아 다른 순례자들과 둘러앉아 아침을 먹는다. 대부분 오늘 길을 나서는 이들이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있지만 여유로운 우리와 달리 그들은 마음이 바빠 보였다.

같이 있는 듯 하지만 따로 있는듯한 느낌이 든다.

지금 기분이 어떨까? 내일 이 자리에 나는 어떤 상태일까?

먼저 길을 떠나는 이들을 지켜보고 있는 마음이 아주 묘하다. 당장이라도 가방을 메고 떠나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덜컥 두렵기도 하다.

오묘한 감정들을 잠시 눌러두고 길을 떠나는 이들에게 진심 어린 마음을 담아 응원을 보냈다.


이제 알베르게에는 주인아주머니, 강아지 그리고 우리만 남겨졌다.

루돌프 인형을 애지중지했던 슈크

알베르게는 특성상 연박을 하더라도 체크인 시간까지 자리를 비워줘야 한다.

그래도 주인아주머니가 배려해주신 덕분에 12시에는 다시 알베르게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지만 날씨는 여전히 춥다. 길 위에서 길을 떠나는 이들을 구경하며 동네 산책을 하다 잠시 성벽 앞에 위치한 성당에 들렀다.

컨디션이 많이 좋아지지 않은 아빠의 소식과 그 옆에서 혼자 힘들어할 엄마를 위해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도.... 기도를 마치고 저녁 미사 시간 확인도 잊지 않았다. 내일 주일 미사를 못 볼 지도 몰라 토요 특전 미사를 미리 드리기 위해서다.


한참을 바쁘게 보낸 것 같은데 시계는 더디게 움직인다.

성당에서 나와 순례길에 필요한 물건을 마저 준비하기 위해 근처 큰 마트에 들렸다.

마트도 아직 문을 안 열었네...? 하지만 마트 벽에 찰싹 붙어 무료 와이파이를 쓰니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샴푸, 바디샤워 올인원 제품을 찾는데 어린 시절 목욕탕 다녀온 아빠의 얼굴에서 나는 스킨 냄새의 제품밖에 없었다. 찬 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가볍게 다녀야 하니..

(이후로 남편은 자꾸 나에게서 다른 남자 냄새가 난다면 놀려댔다.)

올인원 제품을 바구니에 담고 내일 점심으로 먹을 샌드위치 재료를 사는데 저 멀리서 남편이 해맑은 얼굴로 뛰어온다.






주방을 사용할 수 없는 알베르게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았다며 한국 우동을 들고 왔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갓 넘어온 우리에게 한국 우동은 오아시스 같은 존재다.

더욱이 쌀쌀하기 그지없는 이곳 날씨에 뜨끈한 우동은 정말.. 두 말하면 잔소리다.

조금 비싼 가격이었지만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2유로가 조금 넘게 이 우동이 뭐라고 두 사람이나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걸까..?

우동의 행복이다.  









쇼핑을 마치고 작은 카페로 들어섰다. 걸음이 느린 12시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따듯한 차 한잔으로 몸을 녹이며 밀린 인터넷과 블로그를 하며 시간을 보내니 12시가 성큼 다가왔다.

알베르게로 돌아와 따듯한 온기를 느끼며 여유를 부리다 점심을 먹으러 다시 길을 나섰다.

주말이라 식당 어디나 사람들이 넘쳐났다.

평일과 주말의 경계 없는 삶을 산지도 9개월, 이 주말이 그들에겐 큰 행복감을 선사하겠지 예전에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식당을 찾아 파스타와 맥주를 시켜 그들처럼 이 주말을 즐겨본다.

내일의 걱정과 두려움은 잠시 모른척하고.


다시 돌아온 알베르게에서 밀린 블로그를 썼다. 순례길에 들어서면 블로그 쓰기가 더 어려워질 테지.

시곗바늘은 바쁘게 움직여 어느새 저녁시간이 다되었다.


이미 알베르게는 새로 온 순례자들로 가득했다.

주인아주머니에게 우동 컵라면을 먹어도 되는지 여쭤보고 뜨거운 물을 부탁드렸다.

얼마 만에 맛보는 우동인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우동컵이 나에게는 아마도 잊지 못할 우동이 될 것 같다.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는 5월의 프랑스도....


우동 한 그릇의 행복함을 마음에 꼭 안고 서둘러 성당으로 향했다.

건강하고 안전한 순례길을 염원하며 미사를 드렸다. 미사 후에는 신부님께서 순례자들의 길에 축복을 내려주시기도 했다.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느낌이다.


이제 내일이면 출발이다. 우리의 첫 까미노...

잠 못 드는 밤이 될 것 같다.




프랑스 저 멀리 어딘가에서부터 한 달이 걸려 생장에 도착하신 노부부와 한 방을 썼다. 아침 일찍 방을 나가시다 다시 돌아오셨다. 정확히는 남자 어른이 돌아오셨다.


"새신랑인가요?"

"아니요."

"평행하게 걷는다 생각해요. 걷다 마주 보면 싸워요. 앞만 보고 걸어요."


5년째 꽃피는 봄이 오면 순례길에 오르신다는 노부부의 조언이었다.


평행하게 걷기. 우리는 얼마나 마주 보며 살았을까? 아니면 앞만 보며 살았을까?

우리는 길 위에서 어떤 모습일까..? 길 위에 우리가 궁금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그리고 까미노 - 생장, 시작에 도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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