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체발광 우편함
지금 살고 있는 건물에는 중국인분들도 살고 있다. 한 달에 한두 번쯤은 꼭 중국인분들의 우편물이 우리 집에 와 있다. 그럼 나는 다시 그 우편물을 중국인분들의 우편함에 넣는다. 같은 건물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이름의 우편은 우리 집 우편함에 온 적이 한 번밖에 없는데 왜 중국인분들의 우편물만 계속해서 우리 집 우편함에 들어 있을까. 그리고 중국인분들도 종종 본인 우편함에 있던 우리 집 우편을 갖다 주러 찾아오신다. 동병상련이겠지. 분명 모두 로마자로 표기되어 있는 이름일 텐데 동양인들의 이름은 그중에서 자체 발광을 하는 것인지 다 똑같이 보이나 보다. 와 정말 신기하다.
스무고개
내가 어디서 왔는지 말도 안 했는데 어디서 왔는지 맞추기를 좋아한다. "어느 나라에서 왔어?" 그 한마디로 물어보면 되는데 어떻게든 상대방의 출생 국가를 맞춰내려고 신나 있다. "중국? 일본? 베트남? 대만?" 맞추면 누가 돈이라도 주나. 스무고개 하기 전에 그냥 내가 어디서 왔는지 빨리 말해주는 게 낫다. 이 놀이에 장단 맞춰주고 싶지 않다.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시아 모든 국가들을 면전에서 나열하며 내 국적을 마음대로 추측당하는 동안 내 얼굴은 서서히 굳어간다.
아시아는 우리 모두 하나인가요?
독일에 와서 어학원에 다녔을 때 수업시간에 각 나라의 문화에 대해서 물어보는 시간이 있었다. 선생님은 크로아티아, 알바니아, 러시아, 터키 등등 각각의 나라 이름을 하나하나 짚으며 질문했다. 다른 사람들의 발언이 끝난 뒤 선생님이 한 질문 : "아시아는 어때?"
반에는 나 포함 두 명의 동양인이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 왔고, 한 언니는 대만에서 왔다. 한국과 대만은 쓰는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다. 다른 국가들은 하나하나씩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한국과 대만은 아시아라는 이름으로 묶였다. 한국과 대만 각 나라가 하나하나 다른데 동양이라는 이유만으로 대륙 하나로 뭉쳐서 타자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본능적으로 내 표정이 굳어졌고 정색을 했다. 잠깐 어색한 기류가 흘렀고 난 질문에 대충 대답했다.
수업의 흐름상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고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 하지만 평소에 이 선생님은 대만에서 온 언니를 중국에서 왔다고 착각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래서 선생님의 그 발언에 내가 더 민감했을 수 있다. 대만에서 온 언니에게 중국 이야기를 했을 때 한 번은 내가 손을 들고 정정했다. 우리 수업에는 중국에서 온 사람이 없다고 말이다. 그 선생님은 대만이 중국과 대립하고 있다는 걸 알기는 알까. 자신이 아시아에 관련된 다큐를 본 적이 있다고 길게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아시아에 대해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그냥 나와는 다른 어떤 한 뭉텅이에 대해 신비하게 바라보는 것이었을까.
니하오
가끔 길을 가다가 나에게 니하오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명백한 인종차별이다. 사고 과정을 따져서 해석해보면 ‘아시아 = 중국’이라고 생각해서 니하오를 외친 것이다. 사실 니하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이런 사고 과정을 거치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니하오, 칭챙총'은 그냥 흔한 인종차별 레퍼토리 중 하나다. 그렇다면 중국인에게 니하오로 인사한 것이라면 그것은 인종차별이 아닌가? 상대방의 국적을 지레짐작하고 그걸 행동으로 내보이는 건 그 자체로 무례한 것이다. 물론 니하오 발언을 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국적에 대해서 지레짐작도 안 했을 것이다. 그냥 동양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모욕감을 주고 싶었을 뿐이겠지.
독일인 혹은 서양인들에게 생판 남이고 초면인데 갑자기 인사하나? 그러다간 사람들이 그 사람을 이상하게 볼 것이다. 그런데 왜 나에겐 독일어 인사를 해도 이상한 건데 심지어 니하오라고 인사를 하는가. 다른 건 생김새뿐인데. 다르게 생긴 사람들에게는 쉽게 인사를 던져도 되는 것인가? 아직까지 째려보는 거 말고는 제대로 대응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이제 매뉴얼을 준비해놔야겠다.
피로하다
사람들이 동양인들을 보는 시선들을 내가 내재화한 것 같다. 길 가는 사람들과 눈만 마주쳐도 '내가 동양인이라 그런가?'라는 피해의식부터 든다. 나는 그냥 독일에 거주하는 사람 한 명일 뿐인데 계속 나를 동양 여성으로 의식하게 된다. 왠지 내가 이 행동을 하면 그게 나 개인을 넘어서 동양인들에 대한 평가로 이어질 것 같아서 두렵다. 예의 있게 행동하면 "아~역시 아시아인들은 예의가 바르고 착하지." 예의 없게 행동하면 "아시아인들 매너 없던데?"라고 말할까 봐, 말을 많이 안 하면 "역시 동양인들은 수줍음이 많아"라고 할까 봐 온갖 생각이 다 든다.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하면 되는데 어떤 행동을 해놓고도 내가 잘한 행동이 맞는지를 계속 검열하게 된다. 나는 그냥 나이고 싶은데 머릿속에서 동양인 여성이라는 내 정체성이 스스로 너무 의식돼서 자유롭지가 못하다. 길을 걸을 때도 예민해진다. 집 안이 제일 안전하게 느껴진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도 왜 이리 피로한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