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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정훈 Nov 07. 2021

아파트에 이사 오고 생각한 것들


  오래된 빌라에서 오래 살았다. 언뜻 나랑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낡은 공간에서 학창 시절부터 쓰던 책상, 침대 같은 낡은 가구와 함께. 전 세입자가 살다 물려받은 가전들도 몇 개 있었다. 냉장고, 세탁기 같은 것들. 그것들의 한쪽 귀퉁이에는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골드스타, 공기방울 같은 로고가 새겨 있었다. 


  스무 살에 서울에 올라와 오래된 빌라를 전전하다 3주 전 조그만 아파트로 이사 왔다. 물론 전세다. 이사를 하며 대부분의 살림살이를 장만했다. 침대, 소파 같은 가구부터 냉장고, 세탁기 같은 가전까지. 이사 오는 날 물건이 들어온 것도 있었지만, 3주 동안 하나씩 채워나갔다. 커튼도 정확히 치수를 재고 주문한다고 2주 정도는 커튼 없이 생활을 했고 옷장도 부족해서 추가 주문을 했다. 선풍기, 책상, 의자 같은 건 이사 오기 전에 미리 주문을 해뒀지만, 물량이 달리는지 바라던 일정보다 한참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이제는 대부분의 살림살이가 들어왔고 비로소 사람 사는 모양새를 갖췄다. 지난 몇 주간 새로운 공간에서 새롭게 생활하며 느낀 새로운 생각들을 적어보려 한다.      




1. 경험은 나를 선명하게 만든다


  아파트에 이사 와서 느낀 가장 큰 소회는 쾌적함이다. 거실, 안방, 서재에 큼지막하게 뚫려 있는 창을 보면서, 그 창으로 보이는 하늘과 나무를 보면서(사실 아파트가 더 많이 보이긴 한다) 오래된 빌라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쾌적함을 느꼈다. 이전에 살던 곳들은 모텔처럼 창이 조그마했다. 그곳에서 생활할 때 종종 알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는데, 당시에는 공간의 크기에서 오는 감정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빌라보다 아주 약간 더 큰 아파트에 살아 보니 그것이 공간의 크기보다는 창의 크기에서 기인한 감정이었음을 알게 된다. 


  카페를 좋아해 여행을 가거나 데이트를 할 때 근처 유명한 가게는 찾아가 보는 편이다. 개중에 통창이 있어 시원한 개방감을 가진 공간에 매력을 느끼곤 했는데 큼지막한 창이 있는 아파트에 살아 보니 무척 만족스럽다. 내게 풍경이 무척 중요한 요소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된다.     


2. (보통) 물건의 질이 삶의 질을 올려주진 않는다


  대부분의 살림살이를 새로 들였다. 이전에 있던 것이라곤 좁은 집에 어울리지 않게 덩치가 컸던 1인용 리클라이너 정도다. 더 큰 사이즈의 텔레비전, 더 빠르게 작동하는 세탁기, 문이 있는 장롱을 몇 주간 써 본 결과 별 감흥을 느끼진 못했다. 이전에 쓰던 통돌이 세탁기와 비교해서 소음이 적어 덜 불편하다 정도랄까? 물건의 질에 비례해 삶의 질이 올라가지 않는 걸 보면서 더 비싼 가구, 더 유명한 브랜드의 가전에 집착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 물건들이 내 라이프스타일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지 않고 있어서 일 것이다. 만약 내가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드라마나 스포츠 중계 마니아라면 TV나 냉장고의 크기, 그 안에 담긴 최신 기능이 내 삶의 질에 미치는 변화는 컸을 것이다. 대신 사색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새로 산 의자와 조명은 퍽 마음에 든다. 그전에는 식탁 의자가 곧 책상 의자였던 터라 오래 앉아 있으면 허리와 엉덩이 쪽이 뻐근하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새로 산 의자는 꽤 편안하다. 노란 조명도 하얀 형광등과 다른 무드를 조성해줘서 차분하게 하루를 마감하는 데 도움을 준다. 내 삶과 핏이 맞는 몇몇 물건들은 삶의 질을 올려준다.      


3. 내가 살고 싶은 집의 모습에 관해 생각해봤다 


  내가 살고 싶은 집의 모습을 그려보기 위해서는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어야 한다. 사색적인 삶, 주체성을 가지고 임하는 일, 소수의 사람들과의 깊은 관계. 이것이 내가 바라는 삶의 모습이다. 이런 삶이 펼쳐지는 삶의 공간이 꼭 아파트여야 한다거나 단독 주택이어야 한다거나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디에 살더라도 커다란 창이 있어 개방감을 주고 그 창을 통해 하늘과 풀과 나무들을 바라볼 수 있다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공간이 될 것 같다. 초등학교를 품고 있는 아파트, 번화가가 가까이에 있어 생활이 편리한 곳도 필수 요소는 아니다. 그보다는 조그만 집일지라도 개인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다음 거주지를 선택하는 기준이 정립되는 듯하다. 2년 뒤든 4년 뒤든 지방으로 파견을 나가 있는 임대인이 본사로 돌아올 즈음엔 새로운 집을 알아봐야 할 텐데,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다음 공간은 나와 더 어울리는 공간을 만날 수 있길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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