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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우사랑 Mar 03. 2022

계절이 지나간다

with. 한정원_<시와 산책>


겨울을 겨울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당연한 듯해도, 돌이켜보면 그런 시선을 갖지 못한 적이 더 많다. 봄의 마음으로 겨울을 보면, 겨울은 춥고 비참하고 공허하며 어서 사라져야 할 계절이다. 그러나 조급 해한 들, 겨울은 겨울의 시간을 다 채우고서야 한동안 떠날 것이다. 고통이 그런 것처럼.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고통 위에도 계절이 지나간다. 


한정원_<시와 산책> (p.19)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것들에게, 기다린다고 빨리 오지도 않는 것들에게 마음이 달려 나가곤 했다. 대표적으로 계절이 그렇다. 오늘도 달려 나간 마음은 얇은 옷을 꺼내 입는 행동으로 이어지고, 종일 추위에 몸을 움츠리고서야 아직 떠나지 않은 겨울의 존재감에 화들짝 놀란다. 나는 그것이 내가 늘 현재라는 시간과 지금이라는 고통에서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겨울을 겨울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당연한 듯해도, 돌이켜보면 그런 시선을 갖지 못한 적이 더 많"았던 것처럼 나는 늘 마음을 미래에 두고 살았다. 미래는 다를 거라는 낙관도 없었으면서.


오늘 추워서 빨라진 걸음으로 걷는 길 위에서, 고통으로 지나온 계절을 생각했다. 암환자가 되어 날카로운 몸의 고통 속에 눈 떴던 날들이 있었고, 불쌍한 엄마를 따라 그만 죽어버리고 싶었던 날들도 있었다. 얼마 전까지도 그런 기억들로 하루가 시작되고, 시간 곳곳에 박혀 떠나지 않았다. 금방 극복할 거라 생각했던 나를 비웃듯 고통의 기억들은 계속 나를 따라다녔다. 몇 년을 그렇게 살았다. 자꾸 지금을 밀어내면서. 어서 세월이 흐르기를 바라면서. 그런데 살아보니 알겠다. "조급 해한 들, 겨울은 겨울의 시간을 다 채우고서야 한동안 떠날" 거라는 문장처럼, 고통도, 슬픔도, 상처도 그렇다는 걸. 마음을 자꾸 먼저 미래에 던져 놓는 일로 현재의 고통을 밀어낼 수 없다는 걸. 충분히 아프고 흐르는 시간과 함께 딱지가 되어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순간들을 견디고 나서야 가끔은 잊고 살 수도 있게 된다는 걸. 


이제 나는 그런 시간들을 전부 건너온 걸까. 요즘은 겨우 무심하게 훅 지나가는 하루도 생겨났다. 그런데도 얇은 옷을 걸치고 이 겨울을 밀어내려 하는 건, 아마 몸에 남아 있는 버릇 같은 것이리라. 혹은 내 몸을 떠나지 않으려는 고통의 존재감 같은 것이려나. 어쩌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무 생각 없이 지나는 하루가 매일이 된다고 해도 그건 언제나 다시 돌아오는 계절처럼 그저 잠시 뿐이라는 것을. 


분명한 것은,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완전히 떠나보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미리 꺼내 입은 봄옷처럼 마음이 조급하다. 주말엔 다시 반짝 추위가 찾아올 거라는 일기예보도 있다. 넣어버렸던 패딩도 다시 꺼내 툭툭 털어 걸어 두었다. 그렇다고 겨울이 돌아오는 건 아니다. 얼마 남지 않은 겨울의 시간은 결국 봄에게 그 자리를 내어줄 것이다. 


지나 온 몇 번의 계절 위에 남아 있는 내 고통도 오늘 입은 얇은 옷처럼 엷어져 가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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