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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역니은 Aug 16. 2023

혼자 떠나는 첫 유럽여행(런던 편) 03

런던 이틀째 : 뮤지컬 라이온킹 관람기




런던 도착 이틀째 날이 밝았다. 어젯밤에 도착했으므로 본격적인 여행은 지금부터 시작인 셈이다. 오늘은 뮤지컬 <라이온킹>을 보기로 한 날이다. 한국에서 미리 예매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역시 돈 때문이다-데이시트로 표를 구해야 하므로 일찍 나가야 했다. 데이시트란 관람석이 다 차지 않은 경우 싼값에 남은 좌석을, 아무에게도 판매되지 않은 좌석을 판매하는 것이다

(맨 앞자리이거나 앞에서 두 번째 자리이거나).



코로나 이전에는 내가 했던 것처럼 오픈런을 해야 했지만···, 이제는 온라인으로도 예매가 가능하다고 한다. 숙소에서 아침으로 싸준 김밥을 들고 출근인파에 섞여 씩씩하게 워털루 다리를 건넜다. 런던답게 흐리고 쌀쌀한 날씨라 머플러가 필수다. 다리를 건너며 엑소의 전야를 들었다. 누가 뒤에서 톡톡 치길래 돌아보니 내 연보라색 머플러를 건네준다.







머플러가 땅에 떨어진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역시 런던 소매치기 조심해야 한다고 생사람 잡을 뻔했다. 감사의 인사를 하며 머플러를 건네받고 이번에는 좀 더 단단히 둘러맨다. 꽤 일찍 나온 편이라-나는 오전 8시 2분에 도착했다-오픈까지 서너 시간은 족히 기다려야겠다···는 각오였는데, 역시나 빠른 한국인들.

이미 한국인 서너 명이 앞에서 줄을 서고 있다.







우리 뒤로 외국인 관광객으로 보이는 이들이 점점 모여든다. 내 앞에서 기다리던 남자 관람객 두 명과 함께 맛집으로 유명하다는 햄버거 집에서 햄버거와 스테이크를 같이 먹기로 했다. 이러다 갑작스러운 사랑에 빠지는 것 아냐···하면서 수줍어한다. 사랑에 빠지게 되는 누군가의 모습이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연보라색 머플러를 머리와 이마에 히잡처럼 두르고 코를 훌쩍이는 여자애는 아닐 텐데···어쨌든 막연한 기대와 설렘으로 기다린다. 우리는 사랑에 빠지기에는 서로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찬바람에 점점 얼어가는 시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 친구들 많이 수줍은가

본데···라고 약간 실망한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이른 아침부터 추위에 떨던 우리는 우르르 뮤지컬 극장 안으로 들어간다. 접수원이 어디에 앉겠느냐고 남은 자리를 보여준다. 어디서 보나, 편하게 볼 수는 없는 자리들 뿐이다. 애초에 그런 걸 기대하고 데이시트 표를 구하러 오는 건 아니니까. 나는 맨 앞자리에 앉겠다고 한다. 차라리 맨 앞에서 목 아프게 보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보기로 한 라이온킹은 저녁 뮤지컬이므로 일단 줄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객 두 명과 약속대로 햄버거와 스테이크를 먹으러 간다. 햄버거와 스테이크가 꽤 비싸고 맛은 그다지 없었다는 감상 외에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식사자리였다. 나는 이성을 만나면 일단 그들과의 인연을 상상하고 보는 주책없는 사람이었으므로 아마 기대를 가지고 있었겠지만(겠지만, 이 아니라 분명히 있었다) 줄을 섰을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나치게 말이 없었다. 우리가 나눴던 대화라고는···비싸군요···라는 가격과, 가격에 비례하지 못한 맛에 대한 질책 정도였을까. 음식 사진만이 남았을 뿐이다. 우리는 가게를 나온 뒤 어떤 약속도 기약하지 않고 바로 헤어졌다.






나는 코벤트 거리를 지나쳐 국립미술관으로 갔다. 고풍스러운 액자에 걸려있는 유화를 보며 빨간색 벽과, 푸른색 벽과, 회색 벽을 지나친다(각 관람실마다 벽의 색이 다르다).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어린애들과 지도교사 무리가 액자 하나를 앞에 두고 둘러앉아 수업 중이다. 유치원에서 현장 수업을 나왔나 본데···나는 슬슬 그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벤치로 다가가 슬쩍 앉아서 껴들기를 시도한다.








조그만 목소리로 교사의 질문에 대답도 한다. 무료 참관 수업을 듣다가 다시 돌아다니며 그림 사진을 잔뜩 찍고 나오기 전 기념품숍에 들러 귀여운 돼지 일러스트가 그려진 동화책 사진만 찍고 나온다.





다시 뮤지컬 거리로 돌아간다. 해리 포터와 저주받은 아이 뮤지컬 극장을 지나쳐 해리포터 기념품숍에 들어간다. 나도 해리포터에 열광하던 때가 있었다. 친구들과 왜 우리에게는 마법학교에 갈 기회가 오지 않는 것인지 한탄하곤 했다.



한국판이 나오기 전에 먼저 읽고 싶은 마음에 아주 두꺼운 영어판-한국 버전처럼 분절되어 있지 않고 한 권에 다 들어가 있어서-을 샀던 중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마지막 시리즈였고, 인쇄가 잘못된 것인데 환불하지 않았으며, 바로 결론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앞장과 끝페이지를 제외한 중간 부문은(사실 거의 모든 부분) 읽지도 않았으므로···한국판으로 읽은 것이나 다름없고···그 두꺼운 영어판은 한 때 유행하던 허벅지 운동용-허벅지 사이에 힘을 줘서 끼워놓는 것-으로 사용했다. 나는 책을 읽을 때 다 읽지 않은 채 바로 뒷장으로 가서 결론을 확인하고야 마는 습관이 있었다. 스포일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강인함이 엿보인다.






뽀얗고 통통한 헤드위그와 두더지 모양의 니플러와 도비인형···중에서 내가 가지고 싶었던 것은 도비 인형이었다. 도비 인형은 영화 캐릭터와 지나치게 닮게 만들어서 별 호감이 가지 않았으나 나는 곧 그와 같은 도비가 될 운명이었으므로 기념 삼아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아직 월급을 받지 못한 도비가 살 수 있는 금액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도비 인형이 너무 무섭게 생겼어···라고 생각하며 쓸쓸하게 내려놓았다. 해리포터 기념품숍은 여기저기에 있는데 내 기억으로 9와 3/4 승강장 근처에 있던 기념품 숍 도비 인형이 가장 강렬했다.






뮤지컬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쏠쏠했다. 뮤지컬 위키드, 알라딘, 스쿨 오브 락, 킹키부츠 등등 내가 아는 뮤지컬 간판이 보이니 아는 체할 맛이 났다(한국에서 뮤지컬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위키드는 책으로, 그것도 1권만 읽다가 말았다.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추워지고 휴대폰 배터리도 꺼져 가길래 카페에 들어가서 충전을 부탁한 다음 따듯한 카페모카를 시키고 창가에 앉아 가져간 쥐 인형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다시 말하지만 조그만 인형을 데리고 다니며 여행 인증숏을 찍는 게 유행이었다).






저녁으로 뭘 먹었는지 사진도 기억도 없어서 아쉽다. 뭘 먹긴 먹었을 텐데···. 저녁에 뮤지컬을 보러 라이온킹 극장으로 돌아갔다. 당연히 아침에 만났던 한국 일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맨 앞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내 시야에서는 발 바로 아래에, 눈 밑에, 무대 아래(셋 중 무대 아래인 것만큼은 확실하다)를 통해 지휘자와 연주자들이 훤히 보였다. 맨 앞자리에 앉는 데에 이런 장점이 있네,라고 생각하며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데 2층에서 기린이 튀어나왔다! 관객석을 통해서 무대로 등장하는 동물 배우들도 있었다.







화룡점정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뮤지컬 라이온킹 넘버 중에서 아마 가장 유명한 그 노래 'Circle of Life'를 부르며 주술사 배우가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가슴이 벅차 올라서 눈물이 절로 또르르 흘러내렸다. 내 인생에, 이렇게 영국에 와서 뮤지컬을 보는 날이 올 줄이야. 내 인생을 통틀어 이런 감동과 환희-그동안의 인생을 뒤집는 것 같은 반전, 나는 고등학교 마지막 수항여행인 중국 여행도 가지 않았다. 가는 대신 동대문구 교육청에서 초등학생들을 무사히 입학시키는 걸 돕는 보조 알바를 했지-는 없었으리라.



출세했네···라고 스스로를 추어올릴 만했다는 기억이다. 동물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어찌나 유연한지···특히 치타를 맡은 배우의 우아한 몸동작은 마치 발레를 보는 것 같았다(발레를 직관한 적은 없지만 우아한 춤이잖아).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인터미션 시간에 아이스크림을 파는 사람이 들어와 돌아다닐 때, 그걸 순전히 경험으로 먹어보고 싶었지만, 이런 시간에 아이스크림 먹으면 살이 찔 것 같다는 걱정에 먹지 않았다는 거다. 어차피 다 먹지 않고 남겼을 테니-손도 끈적해졌을 거고 다 녹아서 물이 된 아이스크림을 어떻게 처리했겠어-안 먹었던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겠지.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먹어봐야지······.



감동이 채 가시지 않은 채로 다시 워털루 다리를 건너 숙소로 돌아오는 길, 남은 날들도 뮤지컬을 보리라 마음먹었다. 추운 날씨에도 지지 않고 테라스에 앉아 술을 마시는 런더너들을 보며···안 추운가···하면서, 취객을 경계하며 숙소로 바삐 돌아온 기억이다. 취객 중에 술병이나 잔을 깨는 이들도 더러 있었는데, 술에 취해 헤롱 대던 내 대학교 친구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고···그 장면을 보니 한국이나 영국이나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하다, 고 생각했다.



이렇게 영국 이틀째 밤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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