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꽃시장에 가다
** 5일째
오늘도 부지런히 아침을 준비한다.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부지런히 아침을 챙겨 먹는 것 같다. 부엌에 있는 식빵을 프라이팬에 앞뒤로 노릇노릇하게 굽고, 어제 M과 시장에 갔다가 함께 산, 하나에 1유로짜리 망고도 큼직하게 잘라 접시에 담는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다디단 생망고를 통으로 잘라 양껏 먹는 호사를 누려본 적이 없다. 한국에서 망고는 아주 비싼 과일인 축에 속하므로, 건조망고나 아이스망고가 아니면 사 먹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망고 하나에 5천 원은 거뜬히 넘으니까-이렇게 온난화가 심화되다간 한국에서도 망고를 싸게 먹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일은 없었으면-).
초등학교 5학년 때 '나뚜루'라는 아이스크림 전문점에서 무려 거금 2,800원을 주고, '라즈베리 소르베'라는 것을 모친 몰래 사 먹는 간 큰 짓을 했다가 들켜서 혼쭐이 난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그때의 나한테 조언을 해준다면 뭐가 좋을까, 나뚜루가 가고 배스킨라빈스의 시대가 올 테니 우울해하지 말고 관련 주식이나 사놓으라 던 지······어차피 아이스크림계의 킹왕짱은 하겐다즈인데, 걔네는 편의점에서 지들끼리 냉동실 하나를 통으로 차지하고 있을 테고, 어른이 돼도 그건 잘 못 먹을 거란다······라고 미리 말해주거나(그렇게 일찍부터 기를 죽여놓을 필요는 없잖아?).
그러니 어느 부잣집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친구 엄마가 웰치스 한잔을 콸콸 따라줬다고 해서, 이 집 부자네! 하고 감탄할 필요는 없다고······기죽지 말라고. 많은 어른들은 할인률이 큰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하겐다즈 대신 네가 먹던 것보다 크기가 반의 반의 반정도 작아진 돼지바를 먹거나 월드콘을 먹는단다.
네가 먹어보지 않은 음식의 세계가 곧 네가 동경해 마지않는 무언가가 있는 곳은 아니니, 그런 걸 먹는다고 네 무언가를 증명해 줄 거라고 기대하지 말렴. 하겐다즈가 반드시 죠스바보다 맛있으리라는 법은 없지. 한풀이하듯 호텔에 망고 빙수를 먹으러 갔던 내가 감히 단언컨대······망고 빙수는 설빙에서 파는 게 짱이란다!
겨우 아침 먹는 데 서론이 길고 길었다. 오늘은 콜롬비아 로드 꽃시장엘 가서 꽃 한 다발을 산 다음 멋내기용으로 옆구리에 끼고 다닐 생각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시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칼바람이 쌩쌩 불었고 몸도 녹일 겸 뜨거운 커피 한잔을 마셔야겠기에 카페에 들러 모카라테 한잔을 테이크아웃했다. 직원에게 셈을 치르며 오늘 날씨 참 얼음장 같다, 고 했더니 비니를 뒤집어쓴 직원은 런던 날씨란 원래 이렇다, 며 씩 웃어 보였다. 지하철역에서부터 20분만 걸어가면 된다고 했는데 나는 방향을 잃은 채 근처를 빙빙 돌고 있었다.
내가 걷고 있는 거리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입는 히잡이나 긴 원피스를 파는 옷가게들이 도로 양옆으로 늘어서 있는 곳이었으므로······찾고 있는 꽃시장이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오들오들 떨며 한참을 돌아다니다 꽃무더기를 든 사람들을 발견했고, 그들이 온 방향으로 들어가자 눈앞에서 형형색색의 꽃천지가 펼쳐졌다.
세 종류의 꽃을 섞어 한 묶음에 10달러에 팔길래 하얀색, 연분홍색, 노란색의 장미꽃 3묶음을 샀다. 바스락거리는 꽃다발을 품에 소중히 안은채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초록색 벤치에 앉아 열과 성을 다해 꽃다발과 함께 셀카를 찍는 것이었다.
시장에는 간단한 먹거리를 파는 노점들도 많아서 점심은 그곳 중 한 곳에서 때우기로 했고, 국적이 불분명한 상인으로부터 국적이 불분명한 치킨과 볶음국수를 사 먹었다.
콜롬비아로드를 빠져나와 해리포터에 남은 애정이 없었지만, 런던에 왔으니까, 킹스크로스역 3/4 승강장을 구경하러 갔다.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린 뒤 카트를 밀며 벽에 박는 시늉을 하는, 학교에 가려고 고군분투하는 해리포터를 흉내 내는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줄을 설까 말까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줄을 서지 않고 도비 기념품숍으로 가서 도비 인형과 도비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와 가방을 구경했다.
30달러짜리 도비 인형이 사고 싶었지만 너무 비싸다 싶기도 했고, 역시 너무 영화 속 도비를 닮아서 안고 자기에는 조금······. 지금 사진을 들여다보니 인형이 아니라 그때는 관심도 없었던 도비 티셔츠가 너무 가지고 싶다. 인형이 아니라 티셔츠를 두어 벌 샀어야지, 하고 과거의 나를 책망해 보지만 역시 그때로 되돌아가면 안 사고 나올 것 같다.
오늘 하루가 너무 춥고 외로웠기 때문에 따듯한 국물요리가 먹고 싶었다. 마침 코벤트거리 어딘가에서 차이나타운을 본 적이 있었고, 차이나타운에 즐비해 있는 중국요릿집 중 한 곳에 가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가게마다 게 요리를 팔고 있기에 런던의 차이나타운은 게 요리가 유명한가 해서 먹어볼까 싶었지만 너무 비싼 거 같아서 다른 걸 고르기로 했다.
가게는 외양만 조금씩 다를 뿐 비슷한 메뉴를 파는 것 같았고, 결국 뚜렷한 선정 기준 없이 어느 이층짜리 중국요릿집에 들어가 동파육 조그만 한 접시랑 계란과 전분을 푼 걸쭉한 국물에 숙주와 버섯, 완두콩이 들어간 수프, 군만두 네 개를 시켰다. 이렇게 쓰고 보니······게 요리만큼이나 화려해 보이네.
내가 앉은 테이블이 1인용 테이블이 아니라 혼자 앉기엔 자리가 많이 남기도 했거니와, 웅성거리는 연말 분위기와 도란도란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정겨움이 더해져 비교된 내 처지에 외로움은 점점 더 심화되었다. 수프도 동파육도 내 입에는 좀 짰다. 게 요리를 먹었어도 이렇게 울적했을까······직원과 주문에 필요한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것 외에는 입을 뗄 일이 없기도 했다. 유럽여행 카페에서 일행을 구하려면 구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일이면 런던을 떠나 포르투로 가야 했다.
마지막으로 런던아이를 한 번 보고 가야지 싶어서 런던아이가 잘 보이는 맞은편 다리 쪽으로 걸어갔다. 배낭을 메고 나와 가까이서 런던 아이를 구경 중이던 중년 남성을 만났는데 아마 그도 혼자 여행 중인 것 같았다.
누가 먼저 사진을 찍어줄까, 이런 부탁을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나는 너무너무 외로웠다-는 기분에서 벗어나 활짝 웃으며 그의 인생사진을 남겨주기 위해 허리를 제쳤다 숙였다 난리를 쳤고, 그가 런던아이 중앙에 들어오도록 레프트, 레프트! 라이트, 라이트! 를 외치며 방향을 주문했다. 제법 만족스럽게 이런 게······바로······K-사진입니다······라고, 흡족한 기분으로 그에게 카메라를 넘겨주었다. 그도 나만큼이나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어주었던가? 그는 기대한 것보다 훨씬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환하게 웃으며 만족스러운 작별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