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딜라이트콜드부르인가 블랙글레이즈드라테인가
요즈음 나는 하루에 한 번꼴로 스타벅스에 가고 있고
-스타벅스를 알게 된 뒤로 살면서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스타벅스를 가고 있는데 내가 자주 가는 스타벅스 지점의 직원이 언젠가 늘 드시던 걸로요, 하면서 자연스럽게 내게 음료를 내줄 날을 은근히 기대하면서-
늘 아이스자몽허니블랙티 톨사이즈를 주문한 다음 샷을 한 번 추가하고 시럽은 한 번만 넣어달래서
얼음컵 한잔을 같이 트레이에 받아와 물과 섞어 마시며 천천히 두 시간에서 세 시간쯤 노트북을 하고 집에 돌아간다.
휴직을 결정한 이후 약 6개월 간 거의 매일, 줄기차게, 스타벅스 아이스자몽허니블랙티를 마셨는데
얼마 전부터 스타벅스 신메뉴로 나온
한정판 블랙글레이즈드라테가 자꾸 눈에 밟혔다.
'블랙글레이즈드라테'라는 메뉴 이름만으로는 입맛이 당기지 않았지만, 텀블러에 담겨 나올 내 자몽허니블랙티를 기다리는 동안 블랙글레이즈드라테가 담긴 일회용 컵을 들고 내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음료를 보고 있자면······,
바닐라크림콜드브류처럼 우유와 샷이 섞이면서 나오는 구름 같기도 아지렁이같기도 한 조화가
참으로 절묘하여 구미가 당겼던 것이다.
네이버에 검색해서 열심히 글레이즈드라테가 무슨 맛인지 찾아본 결과 아마 아인슈페너와 모카라테의 조합인가 본데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은 ‘달다구리, 엄청 달다, 당을 포낙 올려준다’ 그렇다면 칼로리는?
한잔에 305kcal니까 햇반 한 개 정도의 열량이다.
샷이 하나만 들어가니까 커피 맛은 좀 연한 축에 속하고, 그래서 샷을 추가하는 사람들도 종종 보이고,
칼로리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우유를 저지방으로 바꾸거나 파우더와 시럽 양을 줄이는 나름의 커스텀을 하기도 하고.
(그럴 바에야 그냥 안 먹고 히비커버스 티나 마시는 게 낫지 않아-하는 냉정한 사람들은 당장 이들에게 용서를 구하세요)
매일의 한 잔 한 잔이 소중하므로 과연 오늘의 음료 몫인 이 한 잔을, 블랙글레이즈드라떼라는 어둡고 찐득하며 위험할 정도로 달콤한 이 음료에 써도 되는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 전 내 옆에 앉았던 대학원생들이 시켜서 이건 지옥에서 온 미키마우스 아니야,라고 낄낄대며 비웃던 역시 스타벅스 신메뉴인 미키딜라이트콜드브루도 검색해 보았는데 열량이 170kcal라 납득할 만했고 적당히 달달한 아인슈페너인 모양이었다.
미키딜라이트콜드브루를 마시고 평가를 남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맛보다는 음료 위에 올파우더로 만든 미키 모양이 얼마나 제멋대로인지를 강조하고 있었다.
내게 음료를 만들어 준 직원은 텀블러라 모양이 잘 안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미리 얘기했는데 나는 음료에 올라간 디즈니 캐릭터가 미키든 미니든 별 상관이 없었으므로 아무려나 괜찮다고 답했지만
옆에 선임으로 보이는 직원과 둘이 붙어 음료를 만들었으며(보통은 한 명이 만들지 않나?), 고심한 끝에 얼음을 더 올리고 폼을 평평하게 쌓은 뒤 다시 파우더를 뿌려 완벽한 미키 모양을 만들어 줌으로써 이 직원이 그동안 숱한 컴플레인을 받은 탓에 이렇게 열성인 것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안타깝게도). 직원들은 미리 경고한 것과 달리 파우더로 두 귀가 봉긋한 완벽한 미키 모양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크림 한 입이 입 안으로 쑥 들어오는 것이 부담스러워 평소에 아인슈페너를 즐겨 마시지 않기 때문에 바로 음료를 섞어 마셨다.크림층이 두터운 건지 애초에 크림맛이 진한건지 다 섞고 나니 콜드브루 맛은 전혀 안 나서 커피를 마시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다는 점은 아쉬웠다.
애매모호게 단 맛이어서, 내가 달긴 하지만 어쨌든 난 170kcal니까라고 머쓱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는 미키를 떠올리자 이 음료가 꽤 맘에 들었다.
스타벅스에서 초코음료를 먹으면 묘하게 화-한 맛이 나는데 이 음료도 그런 끝맛이 있어서, 아니면 내가 음료를 너무 빨리 먹었다는 생각에 커피에 콜드브루를 섞어버려서 그럴 수도 있지만······한잔을 말끔하게 비울 수는 없었고(마음에 들었다며?)
반 넘게 마신 뒤에는(크림 때문에 안 보이지만 아마 거의 다 마신 뒤였을 수도) 역시 자몽허니블랙티를 시켰어야 하는데 싶은 생각도 좀 들어서 그 생각을 하고 나니 블랙글레이즈드라테에 대한 열망이 싹 가시게 되어 앞으로 미련 없이 마음 편하게 자몽허니블랙티를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타벅스 창가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하는 동안 창밖으로 사람 다섯이 달려가는데 아무래도 근처 대학교의 12시 수업을 듣기 위해 뛰어가는 것 같았고, 편의점을 사이에 두고 언덕길과 평지로 갈라지는 지점에서 셋은 언덕으로 둘은 평지로 달려갔는데, 언덕으로 달려간 셋은 자기들이 가는 길이 지름길이라 믿고 좀 더 힘든 길로 뛰어가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아마 평지로 가는 건 조금 빙 돌아가는 길일 것이다). 셋 중 한 명은 지쳤는지, 무리에서 낙오하여 출석에 불리길 포기했다는 듯이 터덜터덜 걸어서 언덕을 다 올라갔다.
그들 다섯이 그렇게 달려간 이후 셔틀버스가 도착한 모양인지 아까보다 훨씬 여럿이 우르르 떼를 지어 달려가는데 이렇게 멀리서 보고 있자니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에 나온 물소나 영양 무리의 대륙 이동을 보는 것 같은······그런 착각이 좀 들었고, 역시 갈림길에서 두 무리로 나뉘어 달려가는 것은 좀 웃겼다. 아마 나라면 언덕으로 뛰어갔을 것이다.
나도 대학생 때 저어기 뛰어가는 사람들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언덕을 올라가곤 했다(하필 학교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뛰다 보면 가방이 어찌나 무겁게 느껴지는지······가방이나 노트북, 신발을(또 하필이면 굽 있는 구두를 즐겨 신었다) 길가에 버려둔 다음 추진력을 얻어 제시간에 당도하곤 했다.
출석을 부르면 다시 나가서 내가 뿌리고 간 것들을 주섬주섬 주워서-한국이니까 한국답게 아무도 그런 것들을 건드리지 않아서 그것들은 언제나 제자리에 내가 던지고 간 모양 그대로 잠자코 있어주었다-수업을 들으러 다시 오거나 친구들과 빙수나 버블티를 먹으러 가거나 교내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다듬었다(이런 양아치 새끼)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설빙과 공차 같은 빙수나 버블티 전문점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마치 요즘 탕화루처럼, 탕화루 이전에는 마라탕처럼, 우리 사이에 화제이고 또 유행이었다)
(머리를 감겨주는 서비스가 15,000원이어서 종종-아니 가끔-자주 받곤 했다)(근처 목욕탕을 가기도 했다)
(아아 쓸수록 한숨이 나오는 나의 대학시절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