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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 Dec 22. 2021

42. 저널리즘의 역사

과학과 예술 사이 그 어디쯤

저널리즘의 위치는 애매하다. 학문에서도 그렇고, 현실 세계에서도 그렇다. 저널리즘의 위치를 알기 위해서는 저널리즘의 역사를 탐구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저널리즘의 역사는 '가치의 역사'다. 가치의 역사는 진보의 역사와는 다르다. 과학과 예술을 비교해서 생각해 보면 쉽다. 과학은 진보의 역사다. 예를 들어, 훌륭한 개발자가 프로그램 A를 개발했다고 하자. 프로그램 A는 한동안 가장 현대적인 취급을 받으며 널리 이용될 것이다. 그러나 10년 뒤 다른 개발자가 A보다 더 나은 B를 개발한다면, A 대신 B가 널리 이용될 것이다. A는 잊히고 B만이 기억되는 것, 그것이 과학의 역사이며, 진보의 역사다.


그렇다면 가치의 역사는 무엇일까? 예술의 역사는 가치의 역사다. 앤디 워홀은 최초로 팝아트를 시도했다. 마릴린 먼로의 사진을 다른 색깔로 프린트해 전시해 놨다. 앤디 워홀 작품의 가치는 20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의 한 영역을 발견했다는 점에 있다. 이후 만들어진 앤디 워홀과 비슷한 작품은, 앤디 워홀의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훌륭하다고 해도, 아류 취급을 받을 것이다. 마르셸 뒤샹이 기성품 변기에 '샘'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는 예술이 되고, 우리가 더 멋진 이름을 붙여도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결과물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널리즘의 역사는 예술의 역사처럼 가치를 발견하면서 이어졌던가? 절반만 맞고, 절반은 틀리다. 그래서 저널리즘의 위치가 애매해진다.


저널리즘의 역사는 미국의 저널리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최초의 뉴스는 오피니언이었다. 발행인들은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신문을 발간했다. 상업적인 이유로 페니 신문이 생겨났고, 페니 신문은 사실을 담은 정보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페니 신문은 저널리즘의 역사에서 '사실'이라는 가치를 발견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다. 이후 저널리스트들은 새로운 사실에 가치를 두고, 이 사실을 발견하는 일에, 그리고 새로운 가치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저널리즘의 역사는 가치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언론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 중 하나인 퓰리처상을 수상한 기사 목록을 봐도 저널리즘의 역사는 가치의 역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저널리스트들 세계에서는 숨겨져 있던 진실, 즉 새로운 영역의 가치를 밝혀내는 것을 최고로 쳐준다. 언론 지망생들이 탐사보도를 보도의 꽃으로 여기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일 것이다.


그러나 저널리즘은 예술과 다르다. 이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점이 다른 것일까? 답을 찾기 위해서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저널리즘을 무엇을 신봉하고, 예술은 무엇을 신봉하지 않는가?


중요한 사실은 예술은 그 어떤 가치도 신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술은 이미 존재하는 가치는 진부한 것으로 취급한다. 예술은 항상 새로운 영역을 밝히기 위해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뒤를 돌아본다면, 이미 발견한 가치를 다시 발견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예술은 변주만을 신봉하며, 변주는 과거의 그 어떤 것도 신봉하지 않는다.


반면, 저널리즘은 과거에 발견된 가치를 피해가려고 하면서도 한 가지 원칙만은 따르려고 한다. 다름 아닌 '진실(Fact)'다. 영어 단어 'Fact'는 우리 말로 '진리'로 번역되기도 한다. 저널리즘은 다른 모든 변주는 허용하지만, 진실을 변주하는 일만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예술보다는 과학을 닮아있다. 진실을 신봉하는 저널리즘의 역사는 과학의 역사와 닮았다. 진리에 한층 가까워진 사실은 과거의 진실을 지운다. 그래서 저널리즘은 예술과 과학 그 어디쯤 애매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문득 저널리즘이 종교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널리즘과 종교는 '진리'를 추구한다. 종교는 하나의 분야를 차지하고는 있지만, 그 역사로만 따지고 보면 과학과 예술을 모두 포괄한다. 16세기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던 기독교의 교리는 과학에 권위를 빼앗겼다. 종교가 주관하던 예술 또한 자유분방한 당시 분위기에 눌려 쇠퇴했다. 1000년 넘게 세계를 관장하던 종교가 과학과 예술 두 분야로 갈린 것이다. 이 두 분야가 각자의 역사를 창출하던 와중에 19세기에 저널리즘이 탄생했다. 


나는 '진실'만을 신봉하는 기자들이 신도들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절대자에게만 가치를 부여하고, '신(god)'만을 신봉하며, 삶 전체를 신으로 환원하는 절대 신도들 말이다. 그런 점에서 저널리스트들은 종교인을 닮았다. 진실 하나로 세상 전부를 설명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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