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수려한 산속에서 몸과 마음을 수양하여 신선의 경지를 이루고 싶은 바람을 굽이마다 풍경의 특징을 살려 이름을 지어 나타내었다. 우리는 9곡부터 1곡에 이르는 방향으로 트레킹을 시작하였다.
버스에서 내려 계곡으로 들어가니, 마치 딴 세상에 온 듯하였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과 울창한 숲은 바깥세상으로부터 시야를 가리며 복잡한 생각들을 단숨에 잠재웠다.
계곡으로 들어가는 길 오른쪽에는 신라 최치원이 쓴 것으로 알려진 ‘선유동(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지금은 관광지가 되어 평범한 모습이지만 당시에는 심산유곡이었을 것이다. 깊은 산중 무릉도원을발견하여얼마나 감동했으면 ‘선유동’이라는 글을 남겼을까 상상해 보았다.
구곡은 장소마다 바위에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어떤 것들은 잘 보이지 않았다. 길을 걷다 보면 스치고 지나기 쉬웠지만 길목마다 설명이 되어 있는 게시판이 있어 좋은 안내자가 되었다.
게시판에는 외재정태진(1876~1960)
이 구곡을 표현한 시가 적혀 있어 이해를 도와주었다. 게시판에 써진 시를 먼저 읽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계곡에 내려가 풍경을 보면서 시를 되새겨 보는 느낌이 좋았다.
9곡은 옥석대다.
낮고 너른 암반들이 계곡을 따라 이어지고 있었다. 계곡물은 암반 사이를 미끄러지듯 돌면서 흐르고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숲에 둘러싸인 계곡은 사람들이 없어 적막하였다. 이제 걷기를 시작했는데 벌써 앉아서 하염없이 흐르는 물만 보고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옥석은 ‘옥으로 만든 신발’이다. 신선들이 남긴 유물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달빛 은은히 비치는 암반 위에 신발을 벗어놓고 목욕을 즐기다 서둘러 가느라 남긴 선인의 신발일까? 선녀와 나무꾼처럼 숨은 이야기가 있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
8곡은 난생뢰이다.
넓은 계곡이 좁아지면서 양옆으로 울창한 숲이 도열하듯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삼각형의 두 꼭짓점이 붙어 있는 듯 푸른 하늘과 숲이 대칭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넓은 암반 사이의 작은 못 안에 숲과 하늘이 반영하며 보였다. 온통 주변은 적막하였다. 여기서 곡을 연주하면 아름다운 공명이 되어 울려 퍼질 듯하였다. 난생뢰는 대나무로 만든 악기 생황으로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악기를 연주한다는 뜻이니 과연 어울리는 것 같았다.
외재 정태진은 이렇게 시를 지어 표현하였다.
돌 여울 물소리 난생의 노랫소리
저 아래 아득히 신선 자취 보인다.
예부터 신선 사는 곳엔 신비롭고 괴이하니
구름 사이 닭과 개는 바로 유안이네
마지막 구절은 회남왕 유안이 임종할 때 남긴 단약을 먹인 닭과 개도 신선이 되었다는 고사를 말한 것이다.
7곡은 영귀암이다.
너럭바위를 끼고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렸다. 영귀란 노래하며 돌아오겠다는 뜻으로 공자의 이야기에 기인한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가장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을까?”
대부분의 제자는 벼슬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한다고 대답하였지만, 증점의 대답은 달랐다. “늦은 봄에 봄옷을 지어 입고 어른 대여섯 명, 아이 예닐곱 명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기우제를 지내는 널찍한 곳)에서 바람을 쐬다가 노래하며 돌아오는 삶을 살고 싶다.”라고 하였다. 그는 평범하게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연과 동화되어 살아가는 삶을 원했던 것일까?
6곡 탁청대,5곡 관람담을 지나 4곡 세심대에 도착하였다.
넓은 너럭바위 밑에는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이 작은 소를 이루며 흘렀다. 머리 위에서 벚꽃이 흩날리며 떨어졌다. 물 위에 떨어진 꽃잎들이 물결을 따라 빙빙 돌며 춤을 추었다.
일행들은 이미 발을 물속에 담그고 쉬고 있었다. 나도 앉아서 옆에 있는 사람들과 물속에서 발을 나란히 세우고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마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듯 즐거웠다. 계곡의 물은 차가워 발이 시렸지만, 기분이 상쾌하였다. 사람들의 웃는 모습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음의 먼지도 씻고 몸의 피로도 씻는 순간이었다. 세심과 세신을 함께 하였다.
세심대에서 충분히 쉬고 나니 피로가 풀렸다. 3곡 활청담, 2곡 영사석, 1곡 옥하대를 가벼운 마음으로 동행들과 함께 걸었다.
걷는 길은 힘들지 않았다. 봄을 맞이하는 연두색 나뭇잎들이 싱그러웠다. 길가에는 노란 산수유와 겹벚꽃이 활짝 피어 있었고 색들이 곱게 어우러져 화사함으로 가득 찼다.
갑자기 누군가 “올챙이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어디, 어디야.” 하고 사람들이 부산하게 몰려들었다.
조그마한 웅덩이에 갓 부화된 올챙이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들 처음 본 것 인양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4월 중순 어느 따스한 봄날, 행복한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