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8. 사랑하는 막내딸
024.12.28. 사랑하는 막내딸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예쁜 나의 막내딸이 이혼한 지 3년이 다 되어간다. 막내가 태풍에 걱정이 된다며 날 데리러 오겠다고 갑작스레 내려오는 중이라는 전화를 했을 때, 괜히, 마음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는데, 예고한 딸의 방문엔 이유가 그리했다. 귀한 딸 잘 모시고 살겠다던 김 서방은 어느새 자기 병원 동료 의사와 새집 살림을 차렸단다. 집과 차를 놓고 몸만 나갔다고 했다. 이혼 도장을 찍었으며 <지긋지긋한 장손 집안에서 탈출 성공!>이라고 웃음을 지었지만, 거짓말할 때마다 눈도 못 마주치고 말하는 버릇은 커서도 똑같다. 나는 그냥 어깨를 토닥여 줄 뿐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머리가 하얘졌다. 이럴 땐 그냥 무심해지고 싶은데 정신은 더욱 기민해져 마음을 날카롭게 찢어놨다. 사실, 우리 딸이 내 눈엔 백배나 아까웠다.
물론, 결혼한다고 데리고 왔을 때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김 서방의 얼굴엔 ’ 공부밖에 아무것도 몰라요 ‘였는데, 나의 기대와 다르게 한 가정을 파괴했다. 바람이라는 이름 앞에 헤어졌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 한편이 저렸다. 김 서방 아니 그 새끼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맘에 안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리숙함을 감춘 얼굴에 짙은 안개가 낀 모양새가 안경으로 가리고 있는 말쑥함이, 매섭게 생긴 눈매를 가려 잘 몰라봤다. 개 같은 놈. 또 생각하니 분해서 마음이 시리다. 연거푸 크게 들이켠 겨울바람이 콧속으로 들어와 가슴에 차갑게 내리꽂았다. 답답한 가슴이 개운치 않아, 갈비뼈 틈새에 가득 들어찰 만큼 콧속에 바람을 크게 담아 뱃속에 넣어도 가슴에 먹먹함을 머금은 한숨은 나의 인중을 타고 뜨겁게 나와 차디찬 겨울 공기와 함께 하얗게 흩어졌다.
김 서방 집안은 우리 집과 많이 차이 났다. 돈도 학벌도 집안도. 딸은 대학을 나와 취업을 하지 못하고 공시 생활을 했다. 틈틈이 소개팅을 나가면 서울에 있는 대학 나 온 학생들이랑만 했다. 2세를 위한 계획이라나 뭐라나…. 하면서 말이다. 어쩜 그리 만나서 데리고 오는 애들이 하나같이 예의도 바르고 인물도 훤칠한지, 유전자가 진화한 것인지. 어쩜…. 내 딸의 능력과 나의 형편이 좀 떨어진다 생각하니 그 사위 될 뻔한 자식들이 괜찮아 보였던 건지 아비로서도 괜히 주눅이 들었다. 허락을 안 해줘야 할 이유를 찾을 이유가 없는 그런 남에게도 귀한 자식이었다.
그렇게 인사시킨 남자만 셋. 하나는 함께 취업을 위한 고시 준비생을 전전하더니 연애 3년 뒷바라지 아닌 뒷바라지를 하더니 공무원시험 합격한 놈은 깔끔하게 헤어졌다. 그 집 부모가 가져온 선 자리를 거역 못 하고 나가 순발력 있게 결혼을 했다. 딸 생각엔 결혼까지 얘기가 오갔던 모양이기도 하고 내가 봐도 많이 우리 딸을 예뻐하던 게 보이던데. 그렇게 엄친아 놈은 엄마 따라 선을 보고 엄마가 결정한 여자랑 결혼했다.
막내딸. 내 딸, 귀한 내 딸이 얼마나 울던지 방에 들어가서 3일을 울던 딸을 꼭 안아 줘 봐도 울고, 머릿결을 만져줘도 울고, 좋아하는 장터에 김치만두와 호떡을 사다 줘도 울고 몇 날 며칠 울기만 하고 방에서 안 나왔다. 앉아 있을 수도 없고 서 있을 수도 없고 딸내미 방문 앞에서 계속 왔다 갔다 했다. 우는 소리가 들릴 때 그나마 잠시 안도했다. 오히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밀도가 가라앉은 묵직한 고요함이 흐를 때 더 걱정이었다. 얘가 자나, 우나, 누워있나, 잠도 안 오고 걱정이 돼서 아주 노심초사 그 상태였다. 딱 3일 그렇게 눈물을 쏟아내더니, 어느 순간 정신을 퍼뜩 차린 딸이 다시 소개팅을 나가기 시작했다. 3일 동안 울며불며하는 애를 보는 내내 불안했던 마음은 장대비처럼 세차게 내리고 가슴을 쓸고 떠나갔다.
이번엔 의사 위주로 만나겠다는 주의였다. 복수심에 불타올라 그런 것인지, 이제 스물다섯 아주 꽃 피울 예쁠 나이이니 얼굴도 반반하니 소개팅은 자주 있었는데, 뭐 오래 만나는 놈들은 없었고 몇 번 만나다 헤어지는 정도였으니, 한 편으로는 길게 갔다가 저번처럼 울고불고 방에서 안 나오는 꼴을 보고 있자니 억장이 무너질 거 같아. 오히려 집안 수준에 맞게 만났으면 했는데, 이놈에 고집, 그리고 한창 예쁠 나이의 외모는 막내딸을 가만 두지를 않았다. 다음 집에 데리고 온 놈은, 큰 과일바구니가 무색할 만큼 인사 하나도 벌벌 떨며 소심함이 온몸에 들어박힌 남자앨 하나 데리고 오고는 곧장 헤어졌다. 깔끔한 정리하는 법을 깨달은 것 같았다. 이렇게 막내딸은 조금씩 연애의 응용기술을 터득하고 성인으로 성장하며 똘똘하게 연애도 하는 것이 귀여웠다.
그리고 데리고 온 김 서방은 얼굴은 공부밖에 몰라요. 였지만 키도 훤칠하고 귓불이 부처님만큼이나 크고 인자한 모양, 반듯하게 자란듯한 느낌이 참 맘에 들었었다. 사위가 될 아이는 양손에 뭔가를 늘 가지고 인사를 왔고 살갑지는 않아도 딸이 그리 원하던 작은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란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으나, 하나 걸리는 것은 장손이란다. 그것도 33대 장손. 장손 그까짓 거 장손이라는 사람 잡아먹는 건 아니었으니 요즘 우스갯소리로 조상한테 잘한 사람들은 다들 해외여행 다닌다는 그런 말도 들리지 않던가. 33대 장손 집안이라는 건 결혼 전에 시어머니 될 상이 <제사가 총 일곱 번이다>라고…. 공표했단다. 조상 덕에 장손인 우리 애가 의사가 됐다며 늘 감사한 마음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런 말을 하는 딸을 볼 때마다, 조상 덕 볼 우리 딸의 모습을 생각했고, 내가 손사래 칠 이유가 없었으며 아주 만족했다. 어미 없이 혼자 키운 부족함이 늘 걱정되었는데 참 고마웠다. 기왕지사 어차피 결혼을 시킬 거 복작거리는 집에 결혼해 사람 사는 정을 느끼며 사랑받으며 살면 좋을 것 같기도 했다. 의논할 아내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만. 혼자 결정해야 하는 심정은 서운하고 아렸다. 막내를 사랑하는 만큼 김 서방에게 아주 공을 들였다. 내려온다고 하면 닦고 쓸고 할 것도 없이.
우리 딸이 산골에서 나고 엄마 없이 자랐어도 티끌 하나 없이 키우려 무던히 애썼는데 이렇게 깨끗한 집에서 보살핌을 받으며 보물같이 자랐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시골집이란 게 매일 쓸고 닦아도 티도 안 나는 법이지만 김 서방이 오는 날은 달랐다. 딸내미의 맑은 얼굴을 닮은 빛을 표현할 길이 없어 마루 문턱 반짝임은 물론이오, 티끌 하나 없이 밝게 보여주고 싶어 들어오는 삐거덕거리는 현관문 경첩에 기름칠을 시작으로 마당에 굴러다니는 낙엽 하나 없도록 했다. 말끔한 집안에 괜히, 먼지라도 날릴까 싶어 마른걸레를 손에 쥐고 창틀부터 액자, 거울, 티브이까지 닳고 닳은 마룻바닥을 닦고 닦으니 햇빛에 반사돼 은은하게 빛나게 했다. 의사 선생님 앉는 자리 빛부터 나라고, 나는 가족이 될 김 서방이 들어오는 문부터 철저하게 정리했다. 앉는 자리는 걸레질을 여러 번 했다. 우리 사위가 편안하라고, 우리 딸을 잘 부탁드린다는 마음으로 빌고 비는 마음으로 윤이 나게 닦았다. 그게 내가 사위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딸은 오면 얼굴이 편안해 보였고 늘 중형 세단을 몰고 왔다. 그렇게 원하던 의사를 만나 결혼하고 조상 덕을 보았는지 집안엔 돈도 좀 있고 물심양면 의사 가족인 폼을 내며 병원을 넓혀가며, 운영하는 병원도 마케팅이라는 걸 잘했다는지 꽤 잘된다고 했다. 성형 손님들도 많아 아주 재미를 보던 중이라 가끔 우리 애를 태워 태백까지 드라이브 겸 왔다며 들러주는 그것만 해도 고마웠다. 아직 아이가 안 생겨 부모로서 늘 걱정이었지만 제사상을 잘 차린 덕에 조상 덕을 봤는지 병원 일은 승승장구했다. 가족이 똘똘 뭉쳐 함께 병원을 확장해 가는 모습에 내가 우리 딸 걱정은 한시름 놨다고 생각했는데,
전국에 태풍 경보가 내려져 산사태 주의 경보가 내려진 그날, 고추밭에 고춧대가 흔들려 뽑히진 않을까 걱정에 우비를 입고 종일 고춧대를 묶고 있었던 날. 내가 혼자 있는 게 걱정이 된다며 서울로 올라가자고 나를 데리러 왔다. 마을회관으로 모이라는 확성기 소리가 마을을 울렸고 나도 곧 마을회관으로 갈 채비를 하는데, 삼삼오오 모여 있었으므로 괜찮다고 하는데도 극구, 날 태우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 먼저 딸이 이야기했다. 집에 아무도 없어 무서우니 같이 있어 달라는 말과 함께 이혼을 공표했다. 그 담담한 표정 속에서 우리 딸의 3년간의 삶의 피폐함이 읽혔다. 시댁, 아이, 병원, 의사, 장손 등등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는지. 아이는 수척했지만 혼자 살아볼 만한 표정을 지었다. <싸울 만큼 싸웠고 포기할 만큼 포기했고 할 만큼 다 했으니, 됐다>는 표정, 이젠 자유다.라는 표정, 이제 놔준 거라며 흘려버리는 말엔.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우거진 숲길에 갈길 잃은 강아지의 공허함이 눈빛에 서렸다. 그 몸집이 큰 김 서방은 우리 딸을 포근하게 안아줄 것 같았는데. 조그마하고 아기 같은 나의 딸을 두고 떠나버렸다. 마음이 한쪽이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헛웃음이 나는 건 김 서방이 만난 여자는 시댁 어른들끼리 인연이 있는 어느 집 딸이란다. 아니 왜 그 엄친아처럼 결혼 전 서둘러 처리할 것을, 인제 와서 뒤엎어 버렸다니, 보석 같은 내 새끼를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마냥 발로 차 버린 듯한 느낌에 비위가 상해 속을 게워냈다. 게워내도 게워내도 진정되지 않는 서글픔을 누구에게 말하리오. 주먹을 세게 쥐고 가슴을 쳐 봐도 해결되지 않을 아이의 슬픔을 내가 어떻게 해주리오……. 집도 차도 다 두고 나갔다는데, 우리 아이가 그 큰 몸집을 어떻게 잡았을 수 있겠는가 생각하니. 형태에서 오는 압박보다, 가족이라는 큰 덩어리에서 한 조각의 맞지 않는 퍼즐이 잘 못 들어가 버려진 채로 덩그러니 집에 있었을 생각에 서러웠다. 아내가 있었다면 따져 물었을까? 아내가 있었으면 나 대신 울어줄까? 아내가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내가 가서 따져 묻고 병원에 가서 김 서방의 뺨 싸대기를 날리고 밧줄로 꽁꽁 묶어 버리는 상상을 했다. 또 김 서방 부모를 찾아가 부족한 딸이지만 한 번만 가엽게 여겨달라 애원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우리 딸 속이 시원할까, 우리 딸이 속이 시원하려면 내가 어떻게 해 줘야 할지 고민을 해봐도 딱히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소나기가 내리치던 날이 지나 태풍이 서쪽으로 흩어지고 나도 다시 집으로 내려와 망가져 버린 고추 지지대를 일일이 더 단단히 묶는데 땀방울과 함께 한없이 눈물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