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8. 설엔 꼭 내려오너라.
아빠 전화다. <설에 내려올 수 있느냐?>는 말에 알았다고는 했다. 나는 순댓국집에서 서빙을 한다. 밤에 침대에 딱 누웠을 때 곤히 잠들만한 일. 그게 바로 서빙과 주방일이라 할 수 있겠다. 자고 난 다음 날 아침, 씻고 바로 일터로 향해도 또 바빠 딴생각할 새 없는 일.
내가 일하는 순댓국집은 유튜브 채널에 순댓국 먹방으로 한 번 나온 이후로 나란히 있는 순댓국집 중에 대박 터진 줄 서는 맛집으로 등극한 집이다. 몸은 고돼도 별도의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없는 곳. 딩동벨에 맞춰 순댓국 뚝배기만 옮기면 되는 일. 동료 눈치 볼 필요도 없이 적당히 언니들 비위 맞춰주면 되는 곳. 처음엔 약간의 텃세가 있었으나 입을 꼭 다물면 해결될 문제였다. 적성에 아주 잘 맞았다. 한 달에 두 번 쉬는 날, 나무 장작으로 불을 때는 찜질방에 간다. 찜질방에서 대여해 주는 큰 수건을 두 개 빌려 하나는 머리에 뒤집어쓰고 하나는 등에 뒤집어쓰고 온몸에 뒤집어쓴 채 들어가 피부가 울긋불긋 벌겆게 꽃이 필 때까지 찜질을 서너 번 한다. 온몸에 깊숙이 서린 차가운 한기가 땀으로 뿜어져 나오는 걸 확인하는 방법은 하나다. 황토색 찜질방 복장이 진한 진흙 색으로 바뀔 때 비로소 희열을 느꼈다. 땀을 흘리며 내 맘속의 설움이 뿜어져 나오는 기쁨을 누렸다. 한 숨자고 나오면 피로 풀기엔 그만이었으며.
내가 태어난 동네, 강원도 태백까지 가려면 여기 일산 끝에서 지하철 두 번 갈아타고 태백행 버스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한 차례 더 갈아타는 장장 5시간 걸리는 산골 오지. 주차장에 방치된 차는 세차장부터 가야 하고 시동이 켜질까?부터 생각하는데 설움이 느껴진다. 하루 10시간 꼬박 일해야 벌 수 있는 돈 10만 원을 주유비로 써야 한다니…. 오랜만에 만나는 귀여운 조카들 용돈 좀 쥐여 주려면 빳빳한 새 돈을 곱게 봉투에 넣어 <‘새해 복 많이 받으렴. ‘ -고모가->라는 덕담도 써야 직성이 풀리는데, 조카들에게 보여 줄 것도 없는 실패자의 인생이며, 나의 얼굴을 들이밀 낯짝이 없었다. 이미 ‘명절에 안 내려감!’ 탕탕탕! 정해 놓은 상태이다. 가족으로 엮인 친정 오빠가 아빠를 챙길 테니 손주 둘 보는 맛에 더 좋아할 것 같기도 했다. 명절은 공식적으로 일하라고 나라에서 정해 놓은 일의 연장선이다. 한국의 명절. 쉬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결혼한 여자나, 결혼하지 않은 여자, 이혼한 나 같은 여자에겐 명절은 쉬는 날이 아니라 고된 날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나에겐 빌어먹을 날이며.
물론, 기름 냄새 고소한 전 부치는 냄새며 보글거리며 끓는 갈색빛 반짝이는 돼지갈비찜. 복작거리는 온기 도는 따뜻한 집안, 아빠랑 오빠 얼굴도 보고 반갑기야 하겠지만, 잠시 즐겁다고 인생에 격하게…. 변하는 건 없다. 기운 빠진 난… 명절 3일 내내 방구석 내 침대에 찰떡처럼 붙어 있고 싶을 뿐…. 원하는 건 없다. ‘딩동’ 벨 소리에 아빠 전화를 얼른 끊어 주머니에 넣고 주방에서 보글보글 끓어 넘치기 전까지 봉긋한 보글 방울이 퐁퐁 터지는 순댓국 뚝배기 4개를 1번 테이블에 서빙했다. 3번 테이블에서 벨이 울렸다. 소주 빨간 거 한 병과 맥주 그리고 맥주잔, 소주잔 4개씩 달라고 했다. 명절 전이라 그랬다. 조금 더 상기된 들뜬 분위기와 그러면서도 어우러지지 않게 고생스런 얼굴이 드리운 주름진 표정들이 뒤섞인 명절이라는 이름이 붙은 시간.
누군가에게는 다가오는 즐거움, 누군가에게는 마음의 부담감, 누군가에게는 온몸이 쑤실 일에 짜증이 솟구치는 순간, 뭐 그런 게 명절의 느낌이 아닐까. 이혼 전에도 그랬다. 명절 내내 음식만 해서 될 게 아니었으니, 일단 명절 음식 리스트부터 작성. 동그랑땡, 애호박 전, 명태 전, 나물 3종 세트인 시금치, 도라지, 고사리나물, 그리고 문어 한 마리 야들하게 삶고, 소고기 양지 푹푹 고아 끓인 뭇국 준비, 햅쌀에 밤, 대추, 북어 준비하고 잊어서는 안 되는 약과와 시할머니 좋아하셨던 방울 유과까지. 거기서 끝나나, 상에 올리는 음식 외 술 안줏거리로 미나리를 넣은 홍어 무침은 기본이요, 소갈비 찜이랑 하필 맛 좋다고 소문나버린 간장게장까지 담그려면 손이 모자라는데, 시누이는 언제나 출판사일로 바빠 거둘 여력은 없었으나, 예의 바르게 꼬박꼬박 선물도 봉투도 잘 챙겨주는 사람이었다. 거기서 합격이다. 그래서 시누이는 봉투라는 이미지와 동급의 어로 생각되었다. 시누이 = 봉투.
이어지는 청소시간은 욕실, 베란다, 거실 소파 밑부터 청소, 창틀, 신발장 대대적인 청소 신공을 발휘한다. 남편은 청소는 안 해도 괜찮다지만 사실입니까?라고 지금이라도 묻고 싶다. 명절에 식탁에 올릴 100개도 넘는 그릇들, 숟가락 젓가락 꺼내 씻어두고, 이불 빨래도 해야 한다. 종갓집이라고 대구 울산 경주에서 바쁘신 어르신 8남매가 장손 집에 모여 서른세 명이 자고 간 적도 있다. 명절 다음날엔 음식을 먹고 또 다들 싸간다. 둘째 작은 엄마는 그렇게 욕심이 많아서 바리바리 싸간다. 내가 아빠 좀 가져다주려고 먼저 김치 냉장고 깊숙이 검정 비닐봉지에 전, 나물, 고기, 과일 등등 감춰 놓지 않는 이상 우리 집에 있는 음식은 순식간에 다 털린다고 보면 된다. 돈들도 있는 양반들이 욕심이 대단하다. 시어머니가 말하기를, 예전엔 <자물쇠로 잠가 놨던 술 장식장에 양주까지 훔쳐 갔단다> 하시니, 말 다 했다. 이혼의 이유는 그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성인이 된 이후 ‘명절에 대해 좋은 기억은 있으십니까?라는 물음엔 찬성파와 반대파가 존재할 것이다.
근데, 마침 순댓국집 사장님이 설 대목이라고 시급을 9860원에서 천 원 더 올려 10860원을 줄 테니 나와줄 수 있냐고 한다. 나의 일터. <복돼지 순댓국> 설 연휴 3일 중에 하루를 안 쉰단다. 주방 이모들이랑 서빙 이모들이랑 다 같이 나와야 할 판이 되었다. 요즘처럼 경기가 어려운 시기에 3일 내내 문을 닫는다는 건 장사하는 처지에서는 손해 보는 장사였다. 서빙이든 주방이든 천 원씩 더 쥐여 주고 음식이 빨리빨리 나와 테이블 회전에 이바지하는 게 승산 있는 일. 자연스럽게 매출 상승을 도와주는 것도 술이며, 테이블에 매출을 톡톡히 올려주는 한몫을 하니, 명절이란 이름에 술은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 소주를 시키는 테이블은 맛보기로 나오는 순댓국 국물이 나오는 3색 모둠순대와 오징어순대를 또는 얼큰 순대 전골 주문이 기본이다. 내가 <복돼지 순댓국>에 사장님이라도 충분히 이해한다. 허니 욕심이 없는 척하는 두리뭉실 웃어대는 순댓국집 사장님 부부도 아마 “다들 잘 쉽시다!!”라는 말이 입이 안 떨어졌을 거다. 다들 깍두기 담글 용도의 무와 중국산 김치 다섯 상자를 냉장고에 쟁여놓을 때 왜 아무도 관심이 없었는지…. 지난 추석에 다음 설에 쉬게 해 준다더니, 갑자기 나올 사람을 자발적 동의를 받는다니……. 주방이든 서빙이든 숙덕숙덕 뒤에서 말들이 많다. <그럼 그렇지>라며…. <우리 중에 누가 나와야 해?> 라며…. 소곤거렸다. 일단, 사장보다도 주방 왕이모한테 통보했다. 어차피 3일 쉴 거 아니면 아빠 집이 너무 멀어서 못 가니, 그냥 내가 나온다 했다. 사장은 이번 명절엔 다들 쉬게 해 주겠다더니 왜 저러는 거냐며 마음 좋은 이모들까지도 입이 쭉 나와들 있었다. 나는 미소로 답했다. 사장님 부부는 귀가 당나귀처럼 커졌겠지만 이제 5년 차 순댓국집 사장님은 뭐 노심초사하지도 않았다. 자기들이 나올 테면 나올 거고, 안 나올 테면 안 나올 터이니 뭐 그게 걱정한다고 될 일도 아니니 그냥 무심한 척, 본인들은 천 원을 올려준다고 했으니 내심 선심 쓰는 척하며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땅·땅·땅! 3일 연속 우리는 출근합니다!라는 의지를 A4용지로 표현했다.
설 명절 1, 2, 3 영업합니다.
2025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복돼지 순댓국 -
아, 사실, 이번 3일 아니면 휴가엔 집에 있을 생각이 90%이었으나 사장님이 나오라 하니, 갑자기 마음 깊이 넣어 둔 효심 코스프레가 발동해서 마치, 이번에 아빠를 찾아뵙지 못하면 불효녀가 된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이번엔 아빠 얼굴 좀 보고 오려고 했더니 안 되겠구먼,>이라며 효녀 노릇을 하는 이 세상 딸들의 마음에 합류가 되고 싶어졌다. 하지만 형편도 녹록지는 못했다. 나는 나와서 일해야 하는 실질적으로 이 순댓국집에 막내기도 하고 일당 10만 원이면 30만 원이니 적잖은 돈이었으며 그 돈 벌어 아버지 소고기나 사서 보낼 생각도 들고.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피곤한 건 매한가지. 아버지 얼굴 한 번 보는 것 빼곤 뭐, 그렇지 뭐> 라며 아빠가 보고 싶은 마음을 한숨으로 납작하게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