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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휘 Jan 02. 2025

복돼지 순댓국 5

2028년 1월 1일 (3년 뒤... ) – 아빠, 저 왔어요.

이제 아빠는 없다. 매일매일 전화로 시골집에 좀 내려오라고, 보고 싶다고 했는데, 그러던 아빠가, 아빠가 없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처마엔 고드름이 잔뜩 매달려 있고 마당엔 낙엽이 한없이 쌓여있었다. 감나무의 감은 까치가 먹을 만큼만 매달려 있고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었다. 동네 어르신들이 가끔 집을 들여다 봐주시는데 깔끔하게 감을 따 가셔서 몇 개만 주렁주렁. 여차하면 퍽, 떨어질까 말까 하듯 달려 있었다. 대추나무의 대추는 빨갛게 말라 매달려 있었다. 수돗가는 꽁꽁 얼어있고 아궁이도 차가웠다. 나는 우선 아빠가 손질해 놓은 장작을 가져다 불을 땠다. 눈에 젖어 불이 잘 안 붙었다. 신문지를 두껍게 둘둘 말아 공기구멍을 만들어 아궁이 불 속으로 쑥 넣었다. 그리고 눈 맞은 장작도 가지고 들어와 아궁이 주변에 올려 말렸다. 이번엔 한참 있다 갈까 하는 생각이어서 땔감이 많이 필요했다. 집 뒤에 아빠가 틈틈이 패다 쌓아둔 장작의 눈을 털어 수레에 담아 옮겨와 아궁이 주변으로 가져와 말렸다. 드디어 아궁이에 불이 활활 붙었다. <이제 곧 집안에 온기가 돌겠지> 하고 나는 손을 비비며 방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냉기가 서려 있던 집안은 불을 때도 차갑게 얼어있었다. 집안의 공기도 얼어있었다. 벽도 차갑고 나무로 된 문조차 차가웠다. 공기가 차가우니 벽에 걸려있는 액자도, 옷장도, 티브이도 차가워 보였다. 나는 내 옷 위에 저번에 아빠 사다 드린 카키색 패딩을 한 겹 더 껴입었다. 아빠 냄새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따뜻한 옷으로 잘 사드린 것 같았다. 입을 땐 스석스석 차가웠는데 입고 나니 금방 온기가 느껴졌다. 아빠가 안아줬을 때가 생각났다. 밖으로 나가 마당을 쓸기 시작했다. 가으내 쌓여있던 낙엽과 눈이 이제 거름이 되려고 준비를 하려는 듯 눈과 뒤섞여 검은색으로 변해 잘 쓸리지 않았다. 나는 비를 들고 더 박박 쓸었다. 손님이 올 길을 만들 듯이 마루에서 마당 밖까지 낙엽과 눈을 쓸었다. 그동안 얼마나 관리를 잘해 놓으셨는지 길은 금방 만들어졌다. 원래 아빠가 있었을 때처럼. 순댓국집에선 서빙도 하고 주방에서 가마솥도 씻는 담당도 나였다. 팔의 힘 하나는 끝내줬다. 얼굴도 많이 변했다. 어리광부리던 나는 이제 어른이 되었다. 일을 많이 해서 그런가? 팔의 운동을 많이 해서 그런가 웬만한 청소는 끄떡없었다. 처마의 고드름은 삽으로 통통 쳐서 떨어트렸다. 가마솥에 물을 끓여 놓고 집안에 온기가 돌게 했다. 새해 첫날인데 오빠는 해외여행을 간다고 했다. 명절에 남들처럼 여행하며 새언니도 가끔 오는 행복에 행복하길 바랐다. 나는 차로 돌아가 사 온 차례상 거리를 봉지 봉지째 가지고 들어왔다. 아궁이 옆에 아빠가 만들어 놓은 나무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전부터 부쳤다. 기름 냄새가 나야 집 안에 생기가 돌 것 같아 그랬다. 애호박은 곱게 썰어 소금을 뿌려 물기를 빼고 옆에 동태포도 그리했다. 삶은 숙주와 고기, 잘 씻은 김치는 송송 썰고 아빠가 말려둔 고사리를 통통해질 때까지 삶아 잘게 썰어 녹두전 거리를 만들었다. 어젯밤 불려 온 녹두가 잘 불어 있었다. 나는 믹서기를 찾아와 녹두를 갈아 동그랗게 예쁘게 부쳤다. 전도 부치고, 나물도 무치고 생선도 굽고, 소고기 산적도 만들었다. 노랗게 잘 마른 북어도 상에 올리고 차례상에 올릴 배와 사과도 위에만 깎아 상에 올렸다. 설날답게 떡국도 끓이고 무도 넣고 소고기도 달달 볶아 두부를 넣고 만든 뭇국도 뜨끈하게 올리고 밥도 지어 올렸다. 벽에 걸려있던 아버지 사진을 면 보자기로 닦았다. 반질반질하게 닦았다. 상에 올리고 초도 켰다. 가만히 앉아 아버지 사진을 바라보았다.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바닥이 뜨끈했다. 뜨끈하다 못해 뜨거웠다. 내가 뜨거운 방바닥에 쏙 들어가는 걸 좋아하던 아빠의 표정이 생각났다. 윗 공기는 차가웠다. 공기까지 더워지려면 아직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나는 방 안 깊숙이 넣어 둔 유골함을 꺼냈다. 유골함은 왜 도자기로 만드는지 모르겠다. 잘 못 하면 깨져버릴까 만질 때마다 겁이 났다. 나무로 만들면 타버릴까 봐 도자기로 만드는 걸까? 생각했다. 아버지 유골함을 만지고 있으니 그리움이 몰려왔다. 그 그리움은 사랑받은 자만이 알 수 있는 그런 거였다. 가슴 깊이에 심장이 뻐근해지고 뼈가 찌릿해짐을 느꼈다. 오랜만에 잊고 있었던 그리움이 사무쳐왔다. 길도 쓸어놓고 음식도 다 해놨는데. 찾아오는 이가 없다. 처음으로 덩그렇게 앉아 있으니 아빠 심정이 이해가 갔다. 지난여름에 잠깐 들렀다 갈 때는 몰랐는데, 한겨울에 온 집이 이렇게 서늘했을까 생각하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아빠는 이 집에서 혼자 나를 매일 이렇게 기다렸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흘렀다. 하염없이 흘렀다. 왜 아빠를 생각하면 온몸에 물을 쥐어짜듯이 눈물이 흐르는지 모르겠다. 마르지 않는 샘에서 물이 퐁퐁 솟아오르듯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 절을 두 번 하고 가만히 앉아서 아빠 사진을 바라봤다. 아빠가 내 머리를 늘 어루만져주던 그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꽉 껴안아 주던 것도 생각났다. 언제 내려오냐고 기다리던 것도 생각났다. 시집갈 때 들뜬 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모습도 생각났다. 어릴 적 아빠가 산에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가면 나는 아빠를 따라가 작은 나뭇가지를 줍던 기억도 생생했다. 주말 새벽에 영화가 끝나면 끓여 먹던 달걀 넣은 라면도 생각이 났다.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해주던 모습도 생각이 나고, 음악을 들으며 내 귀에 헤드셋을 갖다 대주던 모습도 생각났다.      

정종을 아빠 잔에 따랐다. 아빠 잔에 술을 가득 따라 올리고 내 잔에도 한 잔 따랐다. 아빠 잔에 짠 소리가 나도록 잔을 부딪쳤다. 술잔에 맑은술이 물수제비처럼 일렁였다. 나는 정종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달큼하니 맛있었다. 얼굴이 따뜻해졌다. 바닥 아궁이에 불이 제대로 붙었는지 엉덩이가 데일 것 같았다. 너무 뜨거워 이불 하나를 꺼내서 바닥에 깔았다. 상 위에 아빠 젓가락을 들어 두 번 두드리고 고기 접시 위에 올렸다. 밥에 꽂아놓았던 숟가락 가득 밥을 떠 국에 말았다. 아빠가 맛있게 드셨으면 좋겠다, 생각했더니 마치 맛있게 드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잔에 담긴 술도 내 입에 털어 넣었더니 이 집에 원래 살았던 20년 전이 지금 같았다.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나무 타는 냄새며 우리 집만의 공기의 무게, 집 밖에 산기슭에서 우는 까마귀의 울음소리. 해가 뉘엿뉘엿 지고 금세 어두워졌다. 나는 두런두런 아버지 사진에 대고 혼자 넋두리했다. 술 한잔에 한 마디 술 한잔에 또 한마디 두런두런 얘기하니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공기가 따뜻해지는 걸 보니, 아빠가 나를 꼭 안아주는 포근함에 금방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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