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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휘 Aug 14. 2024

이혼하고 싶은 여자 5

아니면 죽음을 달라

남편이랑 산지 20 년이 되었다.


결혼 전에 사주팔자를 보았다. 점쟁이가 말하길 안 맞아도 이렇게 안 맞을 수 없다고 궁합이 19% 맞다고 이야기했다. 그때 그 말을 믿었어야 했다.


그리곤 결혼 15년 차에 사주팔자를 보았다 전화 상담이었는데 전화 목소리가 생생히 들린다. 굉장히 걱정스러운 말투,,, 한숨이 가득 수화기 너머로 들어온다. “이분은 오라는 곳이 많아도 가지를 않네. 그리고 다른 집 남편은 와이프가 힘이 들면 힘들다 하면 70% 이상은 들어주는데 이 집 남편분은 와이프를 도와주지를 않는 스타일이네요. 굉장히 힘든 삶을 사시겠어요. “


결혼 한지 20 년이 다 되는 시점 얼마 전 다시 점을 보았다. 이번 점은 관상이었다. 관상가가 나에게 말하길 “사업을 할 스타일이니 예술적 보다는 사업을 선택하며 사업에 관하여 큰 배포를 갖고 앞으로 나아가 가라 “고 했다. 사람들과 섞여서 일하는 직종이므로 예술 쪽보다는 요리 쪽 관련 일하는 것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며, 손에 있는 돈을 꼭 쥐고 나가지 않도록 관리를 잘하세요”라고 했다. 팔자 자체에 돈이 없는 거지…


며칠 전, 남편에 관상을 보았다.(나는 참고로 천주교 신자이나 지금은 냉담 중이다) 돈이 흘러 들어올 곳이 없다며… 남편은 사기를 많이 당하고 이용을 많이 당하는 스타일이라며 바람기가 다분한 성격인데 관상학적으로 바람기도 돈이 있어야 되는 것이므로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다면 바람기는 다분한데 돈이 없어서 바람을 못 피우는 거여서 다행인 건지 아닌 건지…


10년 전쯤 이런 일이 있었다. 남편이 PD로 했던 시절. 분명히 오십 대 작가들이랑 해외 출장을 간다고 했는데, 이메일을 뒤져 보니 20대 여성 작가들이었다.


그때부터 나의 우울증을 시작되었고 나는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옆에서 지켜주겠다던 남편은 자기가 아버지가 되어 주겠다고 하더니 그거는 지나가는 말이었나 보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있다.


남편은 어제도 오늘도 집에 있다. 예전에 너무 거짓말을 많이 해서 나의 히스테리는 점점 돋아나 하늘을 뻗쳐나갔다. 의부증은 극에 달하였는데, 집을 나가버렸다. 그리고.. 어찌어찌 맞고 싸우고 치고받고 산 세월이 20년, 남편이 50대가 된 지금 시점 일이 없다.


그게 모두 내 탓인가?? 거짓말을 일삼아 남편을 믿지 못하는 나, 거짓말을 일삼는 남편을 가둬놓은 죄로 일이 없는 남편으로 돈이 없는 지금. 나를 이 감옥 속으로 내몬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남편의 거짓말 =구속과 속박 =일이 끊김=현재 백수) 지옥은 따로 있지 않다. 지옥 속에 내가 있는 건 내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20 년 전 잘못된 선택이 지금 이 지옥 속에 살게 된 것이다


지금은 바꿀 수 없고 바꿀 힘도 없다. 20살 젊고 파랗던 시절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다시 길을 선택하지 않을 거다. 사람은 무엇을 선택하던 후회를 한다지만 이건 흙탕물에 진흙탕이다. 티셔츠 한 장 못 사 입고 결혼생활 20년 동안 반지 선물 1번 받은 적 없이 화장품도 샘플만 쓰고 당근마켓 온도가 80이 될 때까지 답답한 집 속 생활을 벗어날 수가 없다


내 나의 45세, 요즘에는 120 살까지 산다던데 삼 분의 일 살았던 내 삶을 이제 청산해야 할까… 죽음만이 남아있을 뿐 미래는 없다.


남은 삼분의 이는 이 사람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지금 일용직을 하라는 말이 아니라 일을 할 생각이 없다는 거다. 너무 귀하게 자라서 그런가 남들이 우쭈쭈 피디님 너무 잘해요. 이번 작품 너무 좋은데 편집 너무 감사해요. 등등의 말이 없으면 일을 하지 않는다. 이 와중에 자식밖에 없는 80대 노모는 쌀도 사다 주고 닭도 사다 주고, 인삼도 사다 주고, 삼겹살도 사다 준다. 50대 아들이 아직 아가로 보이는가 보다. 성장하지 못한 성인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일하는 것들 중에는 자기가 주체가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주변에 의사들 주변에 한의사들, 주변에 항공사 이사직, 양자학 교수님, 한의학 박사, 양자 박사, 화학 박사, 성형외과박사들과 지내니 본인이 박사인 줄 대단한 착각에 빠져있다. 정작 본인이 하는 일은 중국에서 들여온 물건 하나 쿠팡에 팔아 600원의 수익을 얻는 일이다.


몸이 조금 괜찮아진 시점, 나는 아르바이트를 구하려고 한다. 집에만 있기 모해 집 앞 문화센터에서 일주일에 한 번 가는 미술을 시작했는데. 취미를 잘 못 선택했다. 소묘 그리기나 할 걸,  물감 값이 이렇게 많이 들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전시회도 해야 되는데 가만히 있어서는 전시회도 할 수가 없다. 캠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취미는 나에겐 너무나 고상하고 어울리지 않았다. 그 고급의 취미를 갖기 위해서 나는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알바를 해야 된다.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물감을 사고 그림을 그려야 된다. 쌀이 살 돈이 없어서 찹쌀과 호박으로 호박죽을 끓이던 중인데, 이런 와중에, 유화라니.. 너무나 사치스럽다. 다행히, 어찌 아신 시어머님은 가는 길에 들렀다며 쌀 20킬로를 주고 가셨다. 며칠 전 내가 없을 때 집에 문을 따고 들어와 쌀독을 들여다보고 가신 모양이다. 애처롭고 안쓰럽다.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게 자식새끼 벌어먹일 능력도 없으니…


다시 앞 전으로 돌아가서 더 많이 20년 전으로 돌아가서 이 길을 선택하라고 낭떠러지라는 푯말을 걸어둘 거다. 이 길은 없는 길이며 없는 길이었다. 나는 왜, 없는 길을 있다고 믿고 개간사업하는 마냥 삽질을 하고 있는지….. 지금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일단, 둘 다 집 안 어른들께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지 않은 이유가 제일 크다. 아이도 고등학생이고….

그냥 남처럼 각자 사는 거다.


낭떠러지에 떨어진 순간은 그때였다.


남편이 술 마시러 간 틈을 이용하여 내 핸드폰요금을 톡으로 보내줬다. 얼굴 마주 보고 이혼얘기하면서 핸드폰비 내달라고 얘기하기가 쪽팔렸다. 남편은 핸드폰 요금이 많이 나왔다고 말했다. 아이 건 이미 냈다고 했다. 내 것만 안 낸 게로군,,, ㅎㅎㅎ


아... 쪽팔려.... 이혼얘기하면서 능력 없어서 핸드폰 얘기하는 내가 너무나 한심해서 내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다. 남편이 말했다. '나는 돈내주는 사람이 아니야' 

아, 맞다. 가장이기를 포기하고, 남편이기는 이 전에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뭘 바라.


30대엔 집에 살림이 조금 힘들면 나가서 벌어 애 학원비도 만들고, 두부도 사고, 콩나물도 샀는데. 몸이 안좋아 그럴 형편이 안되니 사람구실도 못하는구나 싶다. 옷을 언제 샀는지 기억에 없다. 차도 없고, 보험도 없고, 모아둔 돈도 없고.. 통장 잔고 600원이 전재산, 가진거라곤.... 애 하나 밖에 없다. 


다음 주에 병원에서 연계해준 사회사업팀에서 전국민 마음투자 지원사업에 상담하기로 했다. 난 의료지원도 지원이지만 삶의 이유를 모르겠는데... 5일 뒤에 만나기로 했는데 5일동안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지 찾아야한다.

이제 이 여자는 어떻게 살아야할 가치나 의무가 있는가? 고민할 시간이 왔다.


이 여자는 병신이 분명하다. 구태여, 살 궁리를 하고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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