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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랑 Oct 16. 2023

프랑스 치유 일기-에투알 개선문


에투알 개선문 Arc de triomphe de l' Étoile 무료입장 그리고 2020 새해 불꽃놀이

 

매달 첫째 주 일요일은 미술관뿐 아니라 개선문도 무료입장이다. 개선문에서 보는 파리 전망이 에펠탑이나 몽파르나스 타워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멋지다는 이야기를 여러 파리지앵에게서 들었던지라 개선문 전망대는 꼭 한 번쯤 가보고 싶었다.

5년 전 개선문을 처음 봤을 때 책이나 영화에서 보며 상상했던 이미지보다 훨씬 대형 건축물이라 놀랐던 기억이 있다. 높이 50m, 폭 45m의 어마머마하게 커다란 개선문을 카메라에 풀샷으로 담기 위해 계속해서 뒷걸음질 치며 커다란 규모에 감탄했었다. 


파리라는 도시 자체가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로맨틱한 이미지로 각인됐고, 개선문은 파리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라 개선문 역시 덩달아 로맨틱하게 다가왔다. 그때는 시간에 쫓겨 전망대 근처는 가보지도 못했지만, 개선문을 배경으로 사진만 찍어도 좋았었다. 파리에서 사는 동안 개선문을 워낙 자주 보니 처음에 느꼈던 감동은 금세 시들해졌다. 더구나 그 덕지덕지 덧발라진 로맨틱한 이미지를 왕창 걷어내고 보면 개선문이야말로 제국주의의 표상이자, 정복하고 탈취함으로써 힘을 과시하고 싶은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을 상징하는 거대한 건축물에 불과할 뿐이다. 개선문에 새겨진 조각들을 찬찬히 둘러보면 프랑스군이 승리한 전투 장면을 묘사하고 있고, 장군들의 이름이 새겨있다. 킥보드는 반입금지라 밖에 놔두고 가방 검사만 받고 입장했다. 


끝이 안 보이는 나선형 계단에 지레 겁먹고는 도로 나와버린 관광객들이 많아서인지 무료입장 날임에도 입장 속도는 빨랐다. 뒤에서 계속 밀려 올라오는 사람들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숨을 헐떡이며 계단을 올라갔다. 284개나 되는 계단을 너무 얕잡아 본 건 아닐까 뒤늦은 후회 또한 하염없이 밀려왔다. 90% 정도 올라갔을 때, 쉴 수 있는 공간이 나왔다. 개선문에 대한 영상과 조각품들 그리고 건설 과정을 전시로 확인해 볼 수 있었다. 기념품샵도 있어 잠시 들러 구경했는데 역시나 비쌌다. 


대부분의 전망대가 그러하겠지만, 일단 전망대에 도달하면 뼛속까지 시원해지는 확 트인 전경에 힘겹게 올라온 노고가 한순간에 보상받는 경험을 한다. 에투알 개선문도 그러했다. 개선문에서 뻗어나가는 길들의 모양새와 풍경이 하나같이 흡사해 실제로 지상에서 몇 번이나 길을 착각한 적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망대에서 내려보는 12개의 도로망은 판화로 찍어 놓은 거처럼 유사했고, 신기할 정도로 정교했다. 수시로 돌아다니는 파리의 거리를 이렇게 보니 또 새로웠다. 멀게만 느껴졌던 라데팡스가 이렇게 가까운 줄도 몰랐다.


18세기 초에는 에투알Etoile 광장을 중심으로 5갈래의 길만 있었는데, 1854년 나폴레옹 3세의 명으로 오스만 남작Haussmann은 파리 도심을 재설계하며 7갈래의 길을 더하여 지금의 12갈래의 길이 됐다. 이들은 파리가 지금의 아름다운 로맨틱한 문화 도시로 자리매김하는 데 초석을 마련한 장본인이다. 

오스만은 파리의 대표적인 숲과 공원인 뱅센, 블로뉴, 몽소 공원을 만들었고 건물의 높이, 창문의 위치, 발코니의 주조까지 관여하며 파리시의 재개발에 박차를 가하였다. 나폴레옹 3세가 추진한 도시 재개발 이유가 미관을 개선하고, 전염병을 막기 위함도 있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시민 혁명가를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파리의 좁은 골목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항하는 시민 혁명가들을 제압하고 한눈에 파리 시내를 감시할 목적으로 넓은 도로를 개발했다. 


시민들을 힘으로 누르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설계한 파리가 지금은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꼽히며 관광객이 사시사철 넘쳐나 후손인 시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다.

이면을 들여다보면 아름다운 역사는 단 하나도 없다. 

인간을 들여다봐도 똑같다. 어떤 위대한 위인이라 할지라도.

에투왈 개선문 전망대는 비록 나선형의 계단을 한참 동안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 번거로움은 있지만, 소문만큼이나 훌륭한 전망을 볼 수 있다는 점 하나는 확실하다. 



2020년 새해에는 개선문에서 매년 진행하는 불꽃놀이와 레이저쇼를 관람했다. 2019년은 에펠탑 앞에서 새해를 맞이하였지만, 올해는 더 화려한 불꽃축제가 열리는 개선문으로 장소를 정했다. 31일 밤 10시 30분쯤 저녁과 디저트까지 든든히 챙겨 먹고는 파리 집에서 슬슬 걸어 나왔다. 개선문까지 10분 안에 걸어갈 수 있는 거리라 여유 있게 나왔건만, 벌써 개선문으로 향하는 수많은 인파가 집 앞 골목골목을 덮었고 도로에도 차들이 꽉 들어찼다. 가까스로 개선문 상부 일부만 보이는 곳에 겨우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전 세계에서 모인 관광객들과 프랑스 현지인들이 한데 뒤섞여 축제 같은 분위기가 흘렀다. 샴페인을 갖고 가족과 연인과 함께 온 그룹이 많았다. 발 디딜 틈 없는 답답함이 있었음에도 새해를 맞이할 기대감에 젖어서인지 사람들은 들떠있었다. 한 명이 기분 좋아 환호성을 지르면 모두가 덩달아 소리를 지르고, 휘파람을 불고, 손뼉을 치며 신나 했다. 

아이들은 졸음과 사투를 벌이며 자정이 되길 기다렸다. 화려한 레이저 쇼가 밤하늘을 수놓았지만, 멀리서 그것도 측면에서 보니 잘 보이질 않았다. 개선문에는 프랑스 경제, 교육, 사회, 정치 등 분야 별로 2019년 한 해의 성과와 각종 통계 내용이 레이저 쇼와 함께 각양각색으로 비쳤다. 

정확한 시간이 되니 드디어 카운트가 시작됐다. 모두 가 한마음으로 10부터 숫자를 셌고, 기다리던 2020년이 되자 우렛소리와 함께 개선문 위로 화려한 폭죽이 연달아 터졌다. 

사실 언젠가부터 한 해가 마무리되고 새해가 시작되는 시간이 별다른 의미 없이 다가왔다. 새해가 된다고 저절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도, 갑자기 더 좋은 일이 생기는 것도, 해묵은 고민이 단박에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짧고 헛된 인생과 죽음을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을 돌아보며 감사해 보는 감상적인 일도 굳이 연말이고 새해라서 작위적으로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새해를 맞는다는 게 그저 편의상 인간이 만들어 놓은 시간 개념에 지나지 않고, 그 어떤 진실이나 본질을 바꾸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아니 호들갑이나 센티함 없이 그저 평소 여느 주말과 다르지 않게 보냈던 거 같다. 

근데 어쩌다 파리에 와서 개선문과 가까운 집에 살다 보니 이 엄청난 규모의 굉장한 불꽃놀이를 경험할 수 있었다. 

이런 환상적인 스케일의 불꽃놀이를 새해에 봤다고 해서 헛된 희망이 생기거나 다짐한다거나 그러진 않겠지만, 가족들과 평생 기억에 남을 멋진 추억이 생겼다.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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