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아(Odyssea)라는 재단에서 진행한 마라톤 행사에 우리 아이들이 참가했다. 2002년부터 시작해 작년까지 301,500 명의 사람이 달리거나 걸었고, 3,979,000유로의 기부금이 유방암 퇴치를 위한 연구에 사용됐다. 올해도 36,000명이나 되는 인원이 이 의미 있는 행사에 동참했고, 635,000유로의 기부금이 모였다.
1km, 5km, 10km 코스가 준비됐는데 우리 아이들은 만 5세부터 12세 이하의 어린이를 위한 1km 코스에 도전했다. 이 코스는 유방암 환자인 엄마들을 위해 마련됐기에 “Je cours pour Maman”(나는 엄마를 위해 달린다)이라는 의미심장한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마라톤 1km 코스에는 8유로의 등록비가 있는데 이 또한 유방암 연구에 사용된다. 온라인으로 등록을 마치고, 쁠라스 이탈리Place d’Italie역에 위치한 쁘랭탕 백화점Printemps에 가서 사전 배부되는 티셔츠와 번호표를 받았다. 그곳에는 모금 후원을 위해 백화점 측에서 제공한 브랜드 옷들이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중년의 자원봉사 아저씨와 아줌마는 아이들의 티셔츠를 요청하는 내게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엄마를 위한 행사에 엄마인 너도 뛰어야지”라며 티셔츠에 새겨진 ‘pour Maman’을 가리키며 아쉬운 듯 웃었고, 난 그런 아저씨의 농담에 다음에는 아이들과 함께 기필코 뛰겠노라며 지키지 못할 약속으로 화답했다. 마라톤 장소는 12구 근처인 뱅센Vincennes 숲 안에 있는 경마장인데 집에서 한 시간이 좀 넘게 걸렸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습하고 궂은 날씨까지 더해져 행사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몸이 천근만근 쳐졌다. 하지만 ‘나는 엄마를 위해 달린다’라는 옷을 입고 생애 첫 마라톤 도전에 들떠있는 아이들을 보니 마음만은 화창했다.
과학적으로도 맑은 날씨에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는 산소에 포함된 음이온이 활성화되기 때문이고, 흐리고 궂은 날씨에 기분이 가라앉는 건 이산화탄소가 포함된 양이온이 활성화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음이온은 피를 맑게 해 주고 스트레스를 풀어주며 피로회복에 도움을 주는 반면 양이온에서 방출되는 세로토닌은 짜증을 유발한다.
양이온을 내뿜는 날씨임에도 설렘으로 미소 짓는 아이들을 보니 짝지와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친정엄마는 내게 “ 네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내 배가 부르고, 너를 깨끗이 씻기고 나면 내가 개운하다."라는 말을 이따금 하셨다.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자식을 키우며 느낀다. 아이들이 행복하면 우리도 절로 행복해지니 말이다. 부모인 우리에게 ‘아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음이온’이 아닐까 싶다. 물론 더러 양이온일 때도 있지만. 행사는 10시에 시작했지만, 우리는 여유로운 오전을 보내느라 오후 1시쯤 도착했는데 비가 많이 내렸다. 소낙비에 아랑곳하지 않고 온몸을 흔들며 댄스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과 경마장을 가득 채운 신나고 경쾌한 음악으로 분위기는 한창 뜨거웠다. 이런 절정의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은 함께 마라톤을 뛰기로 한 친구들까지 만나 더 신이 났다. 아이들은 한 시간가량 비를 맞으며 뛰놀았고, 음악과 구령에 맞춰 춤추며 자연스레 몸풀기했다. 1km 마라톤이 시작되는 오후 2시가 가까워지니 많은 인파가 몰렸다. 어린이 마라톤을 시작으로 다음 코스들은 한 시간 반 간격으로 진행됐다.
1km 코스는 경마장 내 트랙을 달리면 되지만, 5km, 10km는 경마장에서 시작해서 숲을 가로질러 돌고 돌아오는 코스다.
소나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한바탕 춤사위를 벌인 아이들은 땀과 비가 범벅 돼 속옷까지 홀딱 젖었다. 비가 없는 맑은 날이었다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이렇게 퍼붓는 비를 한차례 맞으며 미친 듯이 춤추며 논 것도 아이들에게는 진한 추억이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행여나 감기에 걸리면 어떡하나, 흙탕물로 시커메진 옷과 운동화는 어떻게 세탁하나 같은 걱정과 고민은 우리의 몫으로 남겼다. 이런저런 근심과 제약 없이 천진난만하게 마음껏 놀 수 있는 시기는 우리 인생에 얼마나 짧은가.
어린이 마라톤이 시작할 무렵 다행히 비도 멎고 날씨가 개었다. 아이들은 제법 긴장한 표정으로 출발선에 섰다.
둘째 아이는 뛰는 아이 중 제일 어렸지만 일등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만큼은 제일 컸다. 내달릴 준비 자세를 취하고선 출발 신호가 떨어지길 누구보다도 집중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한동안 눈을 꽉 감고 기도하는 듯한 모습도 포착했다. 이게 뭐라고 저렇게까지나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상기된 표정으로 진지하게 임하는지 순수한 아이들을 보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생각보다 1km는 꽤 길었다. 첫째 아이는 백 명이 넘는 참가자 중 15번째 안에 들어왔다. 아이들도 이 정도의 긴 거리를 한 번에 달려본 게 처음인지라 성취감과 흥분감에 도취했다. 장거리를 뛰고 난 후라 아드레날린과 엔도르핀이 폭발적으로 분비됐을게다. 결승점에 들어오니 자원봉사자 어른들이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메달을 목에 걸어주고, 간식 가방을 선물로 주고, 손뼉 치며 환호해 주었다. 이 또한 아이들에게 특별한 경험이었다. 작은 사고 하나 없이 어린이 마라톤 순서가 30분 만에 무사히 종료됐다. 여자아이들 1등, 2등, 3등, 남자아이들 1등, 2등, 3등에게 트로피가 주어지는 시상식도 마라톤 직후에 진행됐다. 아이들은 아쉬운 마음에 경마장에 있는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한참을 더 놀았다.
축제 분위기 속에 아이들은 처음으로 마라톤이라는 스포츠를 경험했고 우리는 의미 있는 기부를 할 수 있어 좋았다. 이 행사를 통해 아이들과 ‘유방암’을 이야기할 수 있었고 ‘연대’를 경험할 수 있었다.
마라톤 참가자 중에는 유방암 환자 가족이나 유방암을 이기고 나온 사람 아니면 환자 본인도 있었을 테다. 분홍색 가발을 쓰고 마라톤에 도전하는 이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환호성과 공간을 가득 메운 댄스 음악으로 모두가 함께 한마음으로 즐기는 파티 분위기라 이날만큼은 그 어떤 고통의 그림자도 엿볼 수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겪어보지 못했기에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종류의 아픔과 고통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엄마를 위해 달린다’는 캐치프레이즈에서 희망을 발견하지만 그 이면에 담긴 아픔도 동시에 느껴졌다.
친할머니가 자궁암으로 돌아가셨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나 또한 이런 질병에 자유롭지 않을 테다. 유방암 퇴치 목적으로 연대하여 모인 수많은 사람과 마냥 즐겁게 노는 아이들을 보며 여러 생각이 오고 갔다.
삶은 결코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