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 오후의 열기가 사그라지면 센강으로 산책하러 다녔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막연히 걷다 보니 집 근처 이에나 다리에서 시작해 아치형 다리인 드빌리 인도교를 지나고, 바토무슈 유람선 선착장 근처인 알마 다리를 지나서 앵발리드 다리 밑에 있는 놀이터에서 놀다가 알렉상드르 3세 다리를 기점으로 돌아서 집으로 오는 길이 어느새 코스가 되었다. 힘이 남아도는 날이면 알렉상드르 3세 다리에서 한 블록 더 가 콩코드 다리를 지나 집에서부터 대략 2.7m 거리에 위치한 튈르리 정원까지 센강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이해 겨울 크리스마스 시즌 때처럼 다양한 놀이기구가 들어섰다. 허나 관광객을 상대로 하다 보니 기구 타는 비용이 무지막지하게 비쌌다. 한 번 타는데 5유로였던가?
집에서 멀지 않은 블로뉴 숲에는 놀이기구도 알차고, 놀이터도 여러 개 있고, 동물도 볼 수 있고, 멋스러운 한국식 정원이 있는 놀이공원(Jardin d'Acclimatation)이 있다. 자유이용권이 현장 결제하면 35유로고, 온라인으로 7일 전에 결제하면 28유로다. 한 기구당 적어도 3번 이상은 타니 하루 종일 놀아도 시간이 부족하다. 놀이공원 구석구석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화려한 공작과 마주치는 재미까지 있다. 튈르리에서 범퍼카를 타고 싶다고 조르는 아이들에게 다음에 자유이용권 팔찌가 있는 놀이공원에 가서 실컷 타자며 추로스로 구슬렸다. 평소에 조른다고 거저 얻어본 적이 없는 아이들은 놀이기구 비용이 너무 비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는 체념한 듯 튈르리 정원 내 익숙한 놀이터로 달려간다. 그러고선 경비 아저씨가 문을 닫는 밤 10시 30분까지 신나게 뛰놀았다. (프랑스 추로스는 쫄깃하며 바삭한 게 한국 추로스와는 비교가 안 되는 고급스러운 맛이다.)
센강에는 운동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파리지앵들은 건강하고 아름다운 몸을 유지하는데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는 듯하다. 강가에는 한창 유행 중인 전동 킥보드를 타는 사람들,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람들, 자전거나 롤러블레이드를 타는 사람들, 조깅하는 사람들, 경보하는 사람들로 넘친다. 이런 분위기에 자극받아 나도 한동안 조깅에 열을 올렸더랬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운 센강을 배경으로 뛰고 있다는 사실에 도취해 몇 번 열심을 낼 수 있었다. 의지가 부족한 탓에 결국 흐지부지되고야 말았지만. 어찌 됐든 센강 산책은 자칫 단조롭고 무료해질 수 있었던 우리의 여름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매번 산책을 나설 때마다 우리가 진정 파리에 살고 있구나 감동하며 걷곤 했다. 특히 노을 진 후, 어둠이 내린 로맨틱한 파리의 밤 풍경을 원 없이 볼 수 있었던 점이 가장 좋았다. 그동안 아이들을 일찍 재우느라 파리의 밤을 누리지 못해 아쉬웠는데 이번 여름에 제대로 본전을 뽑았다. 해도 길고 방학도 기니 아이들이 늦게 잠들고 아침잠을 실컷 자도 전혀 문제가 안 됐다. 학교에 다닐 때는 7시 기상, 9시 취침하던 애들이 방학 중에는 10시 반 기상, 11시 반 취침이 일상이 돼버렸으니.
센강에 놓인 모든 다리는 밤에 노란 조명이 은은히 깔린다. 에펠탑은 황금색으로 변할 뿐 아니라 매시 정각에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반짝 빛나기까지 한다. 무쇠 가슴이 아니고서야 다리 위에서 이 야경을 보고 황홀감에 젖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한여름 센강 주변은 웃음소리와 음악 소리로 활기가 넘친다. 강을 바라보며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와인, 바게트, 치즈와 함께 수다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의 소리가 선선하고 쾌청한 밤공기를 가득 채운다.
수많은 관광객과 파리지앵들로 강가에서 영업 중인 바(Bar)나 레스토랑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유람선과 레스토랑 배는 손님을 한가득 태우고 유랑하며 강 위를 떠도는데 배의 조명 덕분이지 그 광경이 센강을 더 고혹적으로 만든다. 어떨 때는 우리도 아예 저녁 도시락을 싸가서 휴가를 못 간 파리지앵처럼 센강에서 피크닉을 했다. 옆에서 북 치며 춤추고 노래 부르는 사람들 덕분에 고조된 강변의 밤 분위기를 고스란히 만끽하며 치즈를 듬뿍 얹은 쇠고기 김치볶음밥을 먹었더랬다.
아이들이 있으니 산책하러 갈 때마다 우리의 목적지는 놀이터가 된다. 나름 알찬 놀이 시설 덕분에 아이들은 한참을 논다. 아이들이 없다면 이런 곳에서 짝지와 함께 칵테일 한잔하며 시간을 보내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을 했다. 갤러리와 바가 합쳐져 있는 이색 공간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 보낸 여름이었는데 센강 산책은 여름 방학의 화룡점정이었다.
어릴 적 명절날 사촌들과 달빛을 맞으며 늦은 밤까지 놀았던 행복한 기억이 있다. 자야 하는 시간에 밖에 나와 노는 거 자체가 뭔가 금기를 깬 행동처럼 설레고 흥분됐던 순간이었다. 평소에는 자라고 잔소리를 퍼붓는 어른들도 옹기종기 모여 화투를 치고 남은 전과 고기를 다시 데워 안주로 먹으며 하하 호호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시간.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런 추억을 선물하고 싶었다.
밤에는 무조건 자야 한다는 공식에서 벗어나 청량한 밤공기와 선선한 바람, 긴장이 풀린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웃음소리와 노랫소리, 어둠 속에 살랑이는 조명이 자아내는 특유의 밤 분위기를 만끽하며 행복한 어른들의 보호 아래 질릴 때까지 놀아보는 것. 파리의 여름밤 센강은 그런 추억을 만들기 완벽한 곳이었다.
이제 9월 2일에 드디어 새 학년이 시작되는 개학이다. 아이들은 새로운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엄마 아빠와 방학 동안 한국말만 하다 다시 프랑스어를 온종일 사용해야 하는 학교가 아이들에게 또 어떻게 다가올지 부모인 우리가 더 긴장되고 걱정된다.
우리 학교도 9월 셋째 주부터 시작이다.
두 달 동안 우리 인생에서 가장 편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충분히 휴식했으니 이제 프랑스 파리에서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을 후회 없이 살아보자고 짝지와 함께 다짐했다.
무엇을 성취하고 이루어서 후회 없는 게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하루 속에 아이들에게 더 인내하고, 짝지를 더 사랑하고, 스치며 만나는 모든 이들 앞에 먼저 웃으며 인사하고, 감사를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해보는 하루.
나에게 주어진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건 곧 나를 낮추는 일이기에 정말 어려운 거 같다. 머리에 든 게 많아 뻣뻣하고 고상해 보이는 것보다 어설프고 맹해 보여도 같이 있으면 즐겁고 편안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
갈 길이 한참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