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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랑 Oct 16. 2023

프랑스 치유 일기-베르사유 정원

 대중교통비가 비싸다. ‘나비고 패스’라는 충전식 교통 카드가 있는데 한 달에 75.2유로(약 98,000원)다. 어린이, 청소년, 학생에게는 관대한 나라라 다행히 아이들 교통비는 저렴한 편이다. 26세 미만 학생은 나비고 (Imagine R) 카드가 일 년에 350유로다. 신청한 첫해는 한 달이 보너스로 더 주어져 한 달에 약 27유로(35,000원)인 셈이다. 이마저도 재학 증명서를 파리시청에 제출하면 350유로 전액 환불받을 수 있는 정책이 올해부터 도입됐다. 이번에 학생용 나비고를 신청하면서 새삼 느꼈지만 프랑스는 아이 키우기 참 좋은 나라다. 


프랑스에서는 아이를 많이 낳으면 가족수당과 다양한 세금 혜택이 주어진다. 만 18세까지 의료비도 나라에서 책임진다.

만 3세부터 공교육이 무료로 시작되고 정규 과정이 끝난 후에도 저녁 6시까지 학교에서 안전하게 돌봐주니 엄마들도 얼마든지 일할 수 있는 환경이다. 프랑스 출산율이 한국에 비해 높은 이유가 있다. 

나비고 카드로 파리 외곽인 5존까지 자유롭게 다닐 수 있으므로 새 학년 첫 바캉스를 맞이해 베르사유 정원을 다녀오기로 했다. 우리 집과 가까운 몽파르나스Gare Montparnasse 역에서 기차를 타니 30분 만에 베르사유 상티에Versailles-Chantiers역에 도착했다. 


10월의 파리는 을씨년스럽다. 수시로 비바람이 내리치고 6시 전부터 어둑해지고 온종일 흐린 날이 잦아 파란 하늘과 해가 벌써 그립다. 그래서 유럽의 겨울이 유난히 더 길게 느껴지나 보다. 그럼에도 파리의 비 내리는 가을이 한국의 여름 소나기만큼이나 자연스럽다는 걸 이제는 아니 비에 상관없이 스케줄을 짜게 된다. 

이날도 한낮 최고 기온이 12도밖에 안 되고 비가 온다는 예보는 있었지만, 샌드위치, 과자, 커피, 주스를 한가득 싸서 겨울 외투를 꺼내 입고는 무작정 기차를 탔다.


물론 여름처럼 여유로운 피크닉을 못 해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는 눈요기할 게 넘치는 프랑스 파리 아닌가. 비가 온다고 집에만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베르사유를 5년 만에 다시 찾았다. 5년 전에 베르사유역 근처 빵집도 그대로 있었다. 추억이 묻은 여행지를 재방문하는 건 시간 여행 같다. 잊었거나 어렴풋한 그 당시 기억과 감각이 순식간에 되살아나니 말이다. 건네받은 동전을 세며 웃는 빵 가게 아저씨의 바쁜 몸짓, 허기진 배에 바삭 달콤 부드러운 결의 빵을 집어넣으며 느꼈던 감동, 그 골목을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닿았던 초가을 바람의 감촉과 설렘 등 5년 전의 내가 그곳에 있는 듯했다. 


금장으로 도배된 어마어마한 규모의 초호화 베르사유 궁전은 언제 봐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난한 농민과 도시빈민의 피와 살을 갉아 지어논 궁전의 스케일과 화려함이 인간의 추악함과 이기적인 욕망을 비쳐주는 거 같아 이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쥘리에트 벤조니의 역사소설 [왕비의 침실]을 읽으며 ‘태양왕’ 루이 14세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루이 14세는 절대 권력을 표상하는 베르사유 궁전과 정원을 지은 장본인이다. 

루이 14세는 4세 때부터 왕좌에 앉아 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절대 군주로서의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의 발밑에 모두가 복종하는 힘을 맛봄과 동시에 권력을 지키기 위한 치열한 사투를 그렇게 어린 나이서부터 감당하는 삶을 살았다. 귀족 세력이 루이 14세 왕과 추기경이자 재상인 마자랭을 상대로 싸운 내란 ‘프롱드의 난’이 소설에 자세히 묘사돼 있는데 루이 14세가 왜 이토록 굉장한 궁전을 지어 귀족들을 불러들이고 감시하고 세력을 약화시키려 집착했는지가 보였다. 왕권을 중심으로 궁 안에 여러 인물의 이해관계가 끊임없이 충돌하고 권력의 대립 구조 속에 정치적 음모, 복수, 중상모략, 폭력이 난무했던 프랑스의 17세기 역사와 실제 인물들에 작가의 상상력을 가미한 소설이라 마치 막장 드라마 시리즈를 보는듯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권력과 돈이 넘쳐남에도 인간의 욕망은 왜 끝이 없는 건지, 그것을 증대시키고자 힘을 가진 자들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포악성과 잔인성은 왜 시공간을 초월하여 어느 나라 역사에서나 반복되는 건지 소설을 읽는 내내 인간에게 염증이 났다. '조국사태'뿐만 아니라 계엄령 문건 이슈나 대형범죄를 저지르고도 불구속 상태인 이명박이나 이재용 등 검찰과 언론 개혁이 절실히 필요한 한국 사회의 현실을 지켜보며 분노했던 마음으로 책을 읽었으니 더 그러했으리라. 


책을 통해 당시 왕족과 귀족의 라이프 스타일이나 역사, 문화, 종교, 가치관을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었던 점은 흥미로웠다. 덕분에 이런 고궁의 공간 하나하나가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분수쇼가 없는 날은 베르사유 정원 입장료는 무료다. 


근처에 산다면 킥보드나 자전거를 가지고 베르사유 정원으로 운동을 다녀도 좋겠단 생각을 했다. 

하늘 위에서 정원을 찍으면 좌우가 정확히 대칭을 이룬다고 한다. 베르사유 정원은 자로 잰 듯한 기하학적인 디자인과 자연이 만나 묘한 조화를 이루며 특유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장시간 이어지는 산책으로 지루해하는 아이들이 징징대기 시작할 무렵 미로 같은 숲길을 만났다. 

아이들이 앞장서서 스스로 길을 선택하며 가는 게임을 즉석에서 고안했다. 두 갈래 길, 세 갈림길, 네 갈래 길을 랜덤으로 만났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한 길을 선택해서 무작정 가는 게 재미난 지 서로를 마주치지 않으려고 뛰어다니며 좋아했고, 나무들 사이를 재빠르게 쏘다니는 청설모를 발견하고는 금세 흥미를 되찾았다. 어떤 여행이든 아이들을 위한 흥밋거리와 놀거리를 찾아주는 건 늘 우리의 몫이다. 

예전 왕족과 귀족처럼 십자가 모양의 운하에서 아이들을 위해 배를 탔다. 워낙 경치가 아름다우니 날이 맑았다면 파란 하늘을 보며 배를 타는 기분이 훨씬 더 좋았겠단 생각을 했다. 짝지는 졸지에 한 시간 동안 팔운동을 하게 됐고 난 멀미와 씨름했다. 베르사유 정원에서 만끽한 가을의 정취는 근사했다. 


5년 전에 왔을 때는 분수쇼와 오케스트라가 있었고, 파란 하늘 아래 볕이 좋아 운하를 바라보며 앉아있었던 그 자체가 힐링이었고 로맨틱했다. 거기에다 햇빛에 반사돼 반짝이는 운하, 그 안에 떠다니는 백조와 오리 무리, 하얀 배 위에서 키스를 나누는 연인들. 이 모든 풍경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라 내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속에 들어온 거 같았다. 그게 베르사유 정원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다. 이번 베르사유 정원에서는 가을의 정기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떨어지는 낙엽을 맞으며 아이들과 손잡고 걸었고 빛바랜 질퍽한 낙엽 위에서 비를 맞으며 뛰어다녔다. 


가을을 온몸으로 부딪쳐 보니 문득 2019년도가 두 달도 채 안 남았단 현실에 휑한 기분이 스멀거리며 피부를 감쌌다. 2019년도는 뭐 한 거 없이 정말 빠르게 갔다. 그뿐인가. 지난번 베르사유에 왔던 게 엊그제 같은데 5년이란 세월이 이렇게 후다닥 지나갔으니. 5년 전 처음 파리로 여행왔을 때는 상상도 못 했던 삶을 지금 살아가고 있는 거처럼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기에 두려우면서도 재미나며, 하루하루 생 앞에 놓인 책임을 감당하며 반복적으로 살아가는 일상은 곤고하니 참 아이러니다. 내가 누군지, 인생이 뭔지에 대한 이해가 작년보다 올해 아주 조금 더 늘었고, ‘내년에는 적어도 지금보다는 이해가 좀 더 깊어지겠지’란 기대가 있으니 그나마 희망적인 건가. 


아직 두 달이나 남았으니, 짝지와 함께 2019년도를 돌아보며 잘 가고 있나 점검해 봐야겠다. 두 달 남았다곤 한들 두 달 후에는 어떻게 채워질지 모를 또 다른 열두 달이 바짝 쫓아오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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