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베노 - 밀라노- 베네치아 - 밀라노
밀라노에서 이틀을 내리 보내기 아까웠는데 민박집 사장님께서 베네치아를 추천해 주셨다. 원래는 5개의 아름다운 해안 마을로 이루어진 친퀘테레Cinque Terre를 여러 사람에게 추천받았지만, 5월 초는 아직 추워서 해변을 이용할 수 없고 걸어야 하는 관광 코스가 많아 아이들과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건 무리란 판단이 섰다.
베네치아는 여행 관련 프로그램을 통해 숱하게 접해 한 번쯤은 가보고 싶었고, 카사노바 영화의 배경지라 친숙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패키지나 배낭여행으로 전 세계를 두루 다녀본 친정엄마로부터 베네치아는 손에 꼽는 낭만적인 곳이니 꼭 가보라는 말을 듣기도 하였다.
그래서 베네치아로 결정하고 하루 전날 기차표를 끊었다. 미리 예매하면 어른 기준 한 사람당 왕복 50유로면 간다는데 우린 100유로를 주고 트레니탈리아Trenitalia 사이트에서 구매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어른의 반값이었고 영문 설정이 가능해 티켓 구매는 어렵지 않았다. 미리 여행 코스를 찾아보고 일일이 동선을 짜는 걸 우리 부부 둘 다 좋아하거나 잘하지 못해 일단 기차에서 알아보기로 하고 아침 일찍 민박집 사장님이 정성스레 차려준 한식으로 조식을 든든히 먹고 나왔다. 날씨가 좋아 덩달아 쾌청한 마음으로 밀라노 중앙역으로 향했다. 시내 중심을 관통하며 다니는 트램은 파리에도 있고 예루살렘에서도 타봤지만, 밀라노의 트램은 그만의 앤티크스러운 특색이 있었다. 대형 사과 모양의 조각을 앞에 둔 고풍스러운 밀라노 중앙역에서 기차를 탔다.
한국에서 한 번도 기차를 타보지 못한 아이들은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긴 기차를 따라 걸으며 숫자로 표기된 우리의 지정 칸과 자리를 찾으며 즐거워했다. 우리 부부는 기차 안에서 베네치아에서 어디를 가야 할지 바삐 검색을 시작하였고 아이들은 창밖 풍경을 지긋이 보다가도 못내 지루함으로 몸을 비틀어 댔다. 10분에 한 번씩 언제 도착하냐고 묻는 아이들 앞에 결국 검색을 포기하고 아이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기차 안은 제법 쾌적하고 승차감도 좋았다. 마지막 종착역에 내려 역사 밖으로 나오니 ‘물의 도시’라는 역사 깊은 항구도시 베네치아의 수식어답게 운하가 떡하니 보였다.
일 인당 20유로나 하는 수상 버스 바포레토 종일권 티켓을 끊고 베네치아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무라노 섬으로 향했다. 아이유 뮤직비디오 촬영지로 유명해진 알록달록한 부라노 섬은 배로 한 시간이나 걸리는 바람에 패스하고 우리는 가까운 무라노 섬만 다녀오기로 했다.
바포레토 종일권을 알차게 사용하기 위해 베네치아 본섬에만 있기 아까워 무라노 섬이라도 다녀오기로 한 거였는데 잠깐이라도 다녀오기를 참 잘했다. 유리 공예로 유명하다는 무라노 섬을 향하는 길은 매우 아름답고 평온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배 위에서 바라보는 베네치아 마을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영화나 여행 프로그램에서만 보던 물 위에 떠 있는 건물과 골목을 실제로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다.
아이들은 바람을 뚫고 빠르게 물 위를 달리는 바포레토 수상 버스에서 운하를 따라 스쳐 지나가는 수상 택시와 곤돌라에 앉아 있는 다른 관광객들을 향해 연신 손을 흔들어 대며 인사했다. 신이 나서 팔이 빠져라 인사하는 아이들을 향해 친절한 관광객들은 웃으며 덩달아 손을 흔들어 주었다. 바포레토로 10분 정도 달려 무라노 섬에 도착했다. 무라노의 건물들은 단조로웠으며 오래되고 수수했다. 운하를 사이에 두고 양쪽 건물들의 1층에는 다양한 종류의 유리 공예품 상점들과 레스토랑들이 즐비해 있었다. 유리 공예품 제작 과정을 직접 목격할 수 있는 박물관에 갔지만, 아이들은 박물관 앞 뜰에서 나뭇가지를 줍고 도마뱀을 찾기 바빴고 유리 박물관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길래 박물관 스케줄은 가볍게 패스했다.
상점들 안에 진열된 유리 공예품들을 구경하며 기념품으로 아이들이 직접 고른 5유로짜리 목걸이를 하나씩 사주고, 역시나 이곳에서도 젤라또를 먹었다. 목걸이를 사준다는 말에 아이들은 여러 상점을 샅샅이 돌아다니며 동물, 꽃, 새, 곤충, 캐릭터, 기호, 무늬 등을 구현한 다양한 크기와 색의 유리 작품들을 관심을 두고 구경했다. 운하를 따라 상점을 구경하며 한참을 걷다가 등대로 보이는 건물 근처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바로 옆 선착장에는 또 다른 섬으로 가기 위해 수상 버스를 기다리는 긴 무리가 기차처럼 줄지어 서 있었다. 우리는 저녁 기차로 다시 밀라노에 돌아가야 하므로 다른 섬들을 둘러볼 여유 없이 서둘러 베네치아 본섬의 중심지인 산 마르코 광장으로 가는 수상 버스에 올라탔다. 돌아보니 무라노는 베네치아 본섬에 비해 조용하고 소박한 느낌의 섬이었다. 무라노에서 점심을 먹을까 하다 시간에 쫓겨 베네치아 본섬으로 금방 넘어왔는데 조용하고 평온했던 무라노에서 한 끼 정도의 식사를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뒤늦게 들었다.
아이들은 빠르게 달리는 수상 버스가 제일 재미있는 놀이인 양 배 외부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추위에 떨면서도 베네치아 본섬으로 가는 내내 고즈넉하면서 운치 있는 배 밖의 풍경을 아빠와 함께 감상했다. 베네치아 중심지인 산 마르코 광장에 도착하니 밀라노 두오모 광장과 마찬가지로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수많은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여기저기서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 이어폰을 끼고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비잔틴 장식의 산 마르코 대성당Basilica di San Marco은 화려한 금장식과 더불어 여러 그림과 조각으로 외관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 밀라노 대성당보다 더 부드럽고 고급스럽고 우아하게 보였다. 반원 안에 그려진 황금색 배경의 모자이크 그림은 햇빛을 받으니 은은히 반짝거렸다.
멀리서 그림들을 보며 여느 유럽의 성당에 있는 성경과 관련된 그림이겠거니 해서 그 당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 성당 외관의 화려함에만 도취해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산 마르코의 유해가 베네치아의 상인들을 통해 이곳까지 오는 과정을 묘사한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 산 마르코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인 마가였다는 사실을 후에나 알게 되었다. 그의 유골은 이 성당에 안치돼 있다고 한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 건데, 나중에 로마에 갈 기회가 있다면 공부를 단단히 하고 가야겠단 생각을 했다. 성당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뙤약볕에 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과 지쳐 보이는 아이들을 번갈아 보며 우리는 깔끔히 그곳을 지나쳤다. 대신 미로 같은 베네치아의 좁은 골목골목을 모험가처럼 정처 없이 헤매며 돌아다녔다. 노래를 불러주고 노를 저어주는 뱃사공이 있는 곤돌라는 한번 타볼까 했지만, 듣던 거만큼 낭만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연이어 기계적으로 다니는 곤돌라가 로맨틱해 보이지 않았을뿐더러 담배를 피우며 노를 젓는 뱃사공에게 30분에 80유로나 지불하면서까지 배를 타고 싶지는 않았다. 수로를 잇는 다리를 건너고 골목길을 다니며 베네치아의 집과 건물을 구경하며 다녔다. 줄 서서 먹는 테이크아웃 파스타를 사서 길 위에 주저앉아 먹기도 하고, 디저트로 젤라또를 손에 들고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사실 아이들과의 자유여행은 쉽지 않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관광지를 쏘다니니 장시간 걸어야 하고, 아이들과 어른들의 관심사가 다르니 늘 장소와 메뉴와 프로그램 선택에 있어 절충안을 찾아야 하는 고충이 존재한다. 절충안을 겨우 찾았다 해도 가족 구성원 모두를 다 만족시키기란 쉽지 않다. 아이들은 조금만 배고프거나 졸리거나 지루하거나 힘들어도 참지 못하고 쉽게 불평을 토해내고 짜증 낸다. 상황을 조곤조곤 설명하며 이해를 구하다가도 어느새 분노를 참지 못하고 아이들을 다그치는 내 모습을 보며 자괴감에 빠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도대체 이런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돈은 돈대로 쓰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며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아이들을 나무랐던 죄책감의 화살이 나를 향한다. 결국 아이들은 기억도 못 할 텐데 다 우리 어른들 욕심 아니냐고 자책한다. 그러다가 생각지도 못한 좋은 장소를 발견하거나, 기대도 안 한 곳에서 힐링 푸드를 맛보게 되거나, 예상치 못한 웃긴 상황을 함께 겪으며 짜증스러웠던 마음이 환희로 변하는 경험을 한다.
아이들과의 여행이 늘 신나거나 행복한 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없었다면 그래서 이 순간을 함께 공유하지 못했다면 얼마나 아쉬웠을까.
결국 자유여행은 ‘절대적인 자유’가 주어지는 인생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에 의하면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 지속적인 의식 활동을 하는 인간은 끊임없이 선택하고, 행동하고, 책임지며 죽을 때까지 자아를 만들어 간다. 자유여행 또한 도전과 선택의 연속이며 그에 따른 대가와 책임이 있다. 낯선 공간에 놓인 우리는 큰 줄기의 방향을 설정하고 함께 자잘한 줄기를 선택하며 책임진다. 목적지를 향해 하염없이 걷다 보면 허기와 피로를 느끼기도 하고, 기대에 못 미치거나 기대와 전혀 다른 목적지 앞에 실망감과 허탈감으로 좌절할 때도 있지만 예상 밖의 귀한 선물을 받을 때도 있다. 힘들고 지친 순간과 즐겁고 행복한 순간과 몸은 고되지만 마음만은 충만한 순간과 길을 잃고 당황하며 헤매는 순간과 타인에게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는 순간을 거쳐 결국엔 목적지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함께 삶을 배운다. 그리고 그 안에 우리만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 구체적인 장소와 상황은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그 순간들의 느낌은 어렴풋이 몸속 어딘가에 남아있을 게다. 그리고 그 느낌 안에 어떤 순간에도 아이들의 손을 놓지 않았던 엄마 아빠가 있다면 고생도 하고 돈도 많이 썼을지언정 그걸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이야기는 우리 안에 간직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분명 힘들어서 후회하게 될 아이들과의 여행이라지만, 다음 바캉스를 위해 외식 없는 절약 모드로 복귀하여 또다시 여행 경비를 모으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 이 모든 여행이 단순 나의 역마살 때문만은 아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