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리 Jul 14. 2019

1%도 확률이다._#2

비겁한 핑계 : 심장소리만 들으면...

심장 소리만 들으면...

 임신은 기쁜 소식이지만, 아내와 나는 조심스럽다. ‘’’조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정확한 단어는 아니다. 이러저러한 행동들을 ‘조심스럽다.’라는 단어로 퉁치고, 나와 아내가 보이는 행동을 살짝 들추어 그 내면을 엿본다. 자세히 보니, 사실 조심스러움 보다는 비겁함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지 싶다. 아내는 아닐지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심지어 이 글에도 지속해서 적어나갈 말이 있다. 마치 단서처럼, 주문처럼 그 말을 되뇌게 된다. ‘심장소리만 들으면...’.

 “누구한테 연락해야 하지 않을까?”

 “심장소리만 들으면...”

 “무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심장소리만 들으면...”

 “언제쯤 편해질까?”

 “심장소리만 들으면...”

 ‘심장소리만 들으면...’ 참 슬픈 말이다. 아내 뱃속에 있는 생명이, 과연 그 생명을 이어갈 존재인지 아직 확신하지 못함을 단적으로 보이는 단어이다.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생명 이건만, 그 생명을 앞에 두고 기뻐하기보다는 멈칫하게 하는 단어니까.




우리 아이 심장소리

 반면에, ‘우리 아이의 심장소리’. 참 설레는 단어이다. 바라는 단어이다. 경험하지 못한 단어이다. 이년 전 아내가 첫 임신을 했을 때, 우리는 그 심장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름조차 아기가 살고 있을 것 같은 ‘아기집’, 그 안에는 아기가 없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임신 초기는 아이의 장기와 뇌와 기타 많은 것들이 만들어진다는 중요한 시기라는 말을 듣기만 했는데, 실제로 체험하게 될 줄이야. 중요한 시기인데, 그 중요한 일들이 진행되지 않았다. 생명의 씨앗은 심겼을지 모르나, 그 씨앗의 미래는 씨앗까지였다. 의사의 눈치를 알아챘어야 했는데... 혹시나 모르니 한주 더, 한주 더, 지켜보자던 경과는 점점 확신으로 굳어졌다.


이년 전 기억 : 듣지 못한 심장소리

 충격이었다. 단순히 ‘한 생명을 잃었다.’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내가 사랑과 마음을 쏟던 대상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 영화 ‘베스트 오퍼’에서 주인공이 그토록 사랑하고 몸과 마음을 모두 준 클레어가 허상임을 깨달았을 때의 충격과 같을까. 내가 지금까지 사랑해오던 것들이 단순히 물건으로 전락할 만큼이나 누군가를 사랑했는데, 그 사랑은 내 물건들을 노린 거짓일 뿐이었다니. 심지어, 끝까지 진심은 아닐까라고 믿고 싶은 주인공의 믿음은 그를 더욱 비참케 한다.(본의 아니게 스포일러를 한 듯하여 죄송하다.)


 첫 아이의 태명은 왕조이였다. 기쁨인데, 정말 큰 기쁨이었으니까. 종교를 가진 우리는 정말 적절한 때에 받은 선물과 같았다. 징표와 같았다. 약속과 같았다. 그런 시기였다. 모두가 축복하고 축하했고, 의심치 않았다. 남들과 같은 때에, 너무 짧지도 오래지도 않은 시기에 우리를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누리는 행복 혹은 과정을 우리도 참 좋은 때에 살았겠구나 생각했다.

 매일매일 아이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아침저녁으로 배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주었다. 특별한 내용은 아니었다. 잘 자라 다오. 건강하게 자라 다오. 사랑한다. 사랑한다. 정말로 사랑한다. 기도를 빙자한 고백이었을지 모른다. 태어나지 않은 그 아이를 생각만 하면 웃음이 났다. 남자아이일까 여자 아이일까. 적어도 둘 이상을 낳았으면 좋겠는데,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아들을 원하니 이왕 있을 것이라면 아들이 먼저인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당시 살고 있던 집 구성을 어떻게 해야 할까도 행복한 대화 주제였다. 언제까지는 이렇게 지내고, 만약 언제까지도 우리가 이 집에 살고 있다면 아이의 방은 저기가 되겠지.


선고

 의사가 선고를 했다. 아기집은 자라지만 그 안에는 아기가 없기 때문에, 아기집을 들어내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소위 유산 수술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기다릴 수 있는 만큼 기다렸고, 결과를 보았다. 일주일을 더 버틴다고 변할 사실은 없었다. 굳이 한 가지를 찾아본다면 아내 몸에 무리가 더해진다는 정도일까.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수술 날짜를 정하고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옷을 갈아입고, 씻고, 집에는 왔는데 더 이상 무언가를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엉엉 울었다. 생명을 잃은 슬픔도 있었지만, 허탈함도 있었다. 우리가 쏟은 사랑은 무엇이었는가. 사랑의 대상은 무엇이었는가, 과연 생명이기나 했을까. 우리가 무얼 잘못해서 그런 것일까. 우리 몸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의사는 상관없다고 했지만, 혹시나 임신 전에 감기약을 먹어서 그런 것일까. 혹시, 우리도 모르게 지었던 죄가 있었을까.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그 이후, 수술 날짜까지 정말 지옥과도 같았다. 사형선고 날을 기다리는 기분이 그와 같았을까. 아내와 마주 앉아, 지금의 상황을 정리하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이야기했다. 마치 꼭 치러야 할 의식인 듯.


 수술 이후에도 쉽지 않았다. 수술을 한 아내는 컨디션이 급격히 떨어졌다. 사람들은 물어봤다. 아이는 이제 몇 개월이냐고.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까. 업무를 처리하듯, 최대한 담담하게, 마치 의사인양. 유산이며, 계류유산이라는 종류이며, 특별한 이유는 없고 확률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나를 오랜만에 만나거나 처음 알게 되는 모든 사람에게 가족관계에 대해 설명해야 했듯이. 대체 왜 다 있는 아버지가 나에게는 없는지 상대방의 감정을 배려하며 이성적으로 이해시켜야 했던 그 시간처럼. 같은 말을 뻐꾸기처럼 반복했다. 사람들은 고개를 숙였다. 나는 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웃었다. ‘괜찮아요.. 어쩔 수 없죠..’ 사실이었다. 안 괜찮으면 어쩔 것인가.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심장소리를 듣는다면...!

이년 전과 비교해보면, 지금의 아내는 왕조이를 임신했을 때와 다른 점이 많다. 마치 교과서처럼, 입덧을 하고, 여기저기가 당긴다. 인터넷에 임신 몇 주째 증상을 검색해보면, 지금 아내가 맞이하는 증상과 같다. 마치 거짓말처럼. 몸에 여러 힘든 점이 있지만, 아내는 감사하다고 말한다. 뱃속에 있는 아기가, 이번에는 내가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계속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처럼, 엄마 불안해하지 말아요 하고 느껴진다고 말이다. 아이가 좀 독한 면이 있고, 성실한 면이 있는 것이 나와 닮았다고도 이야기하고 말이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 입에는 조심스럽게, ‘심장소리만 들으면...’이 붙어있다. 이 말을 나도 모르게 뱉어낼 때마다 아이에게 미안하다. 아이의 존재가 부정될 수 있다는 불안감과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니까. 이런 생각을 했다. 6주와, 1년과, 10년과 30년과 50년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이 아이가 우리가 받은 소중한 선물이라는 사실에는 아무 변함이 없었다. 처음 임신한 왕조이도 마찬가지였고, 지금 우리에게 찾아온 아이 ‘왕요벨’도 마찬가지였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확신이 강할수록 조심스럽다. 이제 4일 후면, 심장소리를 들으러 병원에 간다. 정말 그 두근두근하는 소리를 우리 귀로 들으면 무언가가 달라지겠지, 실감이 나겠지, 이 년 전에 흘렸던 눈물과는 또 다른 눈물이 우리 눈에서 흘러나오겠지. 심장소리를 듣는다면.







매거진의 이전글 1%도 확률이다._#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