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생엔 반딧불이로

by 김잔잔

죽기 전에 간절하게 빌었다.

제발 다음 생이 존재한다면 못생겨도 좋으니 멸종 위기에 처해 각별하게 보호받는 동물로 태어나게 해 주세요. 인간만은 네버! 싫어요.


제가 보니까 그 개체수 번식을 위해 교미를 압박받지 않아도 되고, 어디 울타리 안에서만 살라고 가둬두지도 않고, 그렇다고 인간에게 특별히 쓸데 있지도 않아서 밀렵꾼의 타겟과도 거리가 먼, 그런 팔자 좋은 애들이 있더라구요.

그중 하나로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출처 : 청수리 곶자왈 반딧불이 축제 홈페이지)

제주도 한경면 청수리.

반딧불이가 유난히 많은 이 곳에서 사람들은 숨죽여 야간 산책을 한다. 이 생명체는 소리와 빛에 민감하기 때문에 핸드폰이나 카메라처럼 어떤 인공적인 불빛 없이 그저 옆 사람에게 의지해 조용히 2시간을 걷는다. 아기들이 칭얼거릴라치면 바로 '쉿!' 조심시키는 부모들과 입을 막으며 반짝이는 불빛을 가리키는 작은 영혼들, 그리고 오랜만에 함께 여행 온 노부부와 이제 갓 사귀기 시작한 연인들까지. 같은 조로 만난 이들이 콘크리트 한 줌도 깔리지 않는 숲 속의 흙바닥을 걸으며 소곤거리는 대화는 참 낭만적이다.


최소한의 방해만을 받으며 유유히 숲 속을 밝히는 작은 전구, 반딧불이는 일 년에 단 한 계절 몸을 불사른다. 이 시기 숲을 걸으면 그들만의 평화로운 세상을 엿볼 수 있다. 소모적인 전쟁을 벌이지도, 노후를 위해 초과 노동을 감수하는 일도 없다. 인간에게 징그럽다며 손가락질을 받거나 포획되는 일도 드문 이 작은 생명체는 그저 세상에 나오자마자 몸을 던져 열정적으로 서로에게 구애할 뿐이다.

'나를 봐주세요' '나와 함께 해주세요'

짧은 인생의 절반을 나를 봐달라며 최선을 다해 불을 밝히는 모습이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반짝거리는 불빛으로 가득한 숲 속에 후덥덥한 열기가 바람을 타고 가볍게 불어온다.

깜-박

깜-박

반딧불이들의 낭만적인 여름밤이 시작됐다.


(출처 : 청수리 곶자왈 반딧불이 축제 홈페이지)

칠흑 같은 숲 속 어딘가 소리도 없이 기어가는 애벌레의 작은 몸짓이 보인다.

길쭉한 몸의 끝에서 소박한 불빛을 내며 이끼 위를 기어간다. 바닥은 부드러운 초록색 이끼들로 질척거린다. 고여있는 물기가 애벌레를 따뜻하게 품어준다. 조용한 숲 속은 미세한 자연의 소리들로 풍부하게 차 있는 교향곡 같다. 아주 작은 소리마저 천둥처럼 들린다. 애벌레 한 마리가 몸을 꿈틀대며 이슬을 마신다.


250일.

이 작은 생명체가 번데기가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무려 여섯 번의 탈피를 거치면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벗겨내고 벗겨낸다. 두 손가락으로 조금만 힘을 줘도 부서질 것 같은 몸이 8달을 넘게 살아남아야 깜깜한 밤, 땅 위로 올라갈 자격이 주어진다. 물속에서 다슬기를 먹으며 꿈틀대던 애벌레 한 마리가 끙끙 거리며 드디어 바깥세상으로 나온다.


50일.

번데기가 스스로를 가두는 시간이다. 간신히 육지로 올라온 애벌레가 땅 속에 집을 짓는다. 이제 번데기가 되어 그곳에서 성체가 될 때까지 인고의 시간을 보낸다.

성장은 모든 생명체에게 고통과 인내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인간 역시 죽기 전까지 성장하기 위해 고통 속에서 몸부림친다. 그 시간을 버티는 모든 생명은 경이롭다. 까만 번데기 집에서 희미한 노란빛이 한 달이 넘도록 계속 새어 나온다.


14일.

긴 시간을 거쳐 드디어 먹먹한 숲 속을 밝히게 된 반딧불이의 최대 수명이다. 겨우 1년 남짓한 인생이 애벌레와 번데기를 거치며 다 흘러가버리고 벌써 2주후면 끝이다. 번데기 집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온 반딧불이가 풀 숲에 숨어 세상을 구경한다. 몸빛깔은 먹지처럼 까맣고 머리 쪽 등판은 오렌지빛이 돈다. 날개에는 멋진 세로줄이 있고 사이사이 갈색의 짧은 털이 보인다.


어느 여름밤, 짙은 숲속에서 반딧불이는 자리를 잡는다. 천천히 일정한 박자로 깜박거리며 빛을 내본다.


깜-박

깜-박


나 여기 있어.


급할 것도 없다는 듯이, 시간에 단 한번도 쫓겨보지 않는 것처럼.

300일을 견디고 겨우 2주를 살다 가지만 오늘이 영원할 것처럼 빛을 내는 모습이 멋지다.

나, 이번 생은 반딧불이로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다.



2020.4.20. 오늘의 상상 끝.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반딧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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