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을 향한 거국적 인사
1.
실연하신 분들, 실연을 지켜보고 계셨던 분들, 실연과는 거리가 먼 행복한 어느 세상의 여러분 다들 안녕하신가요? 새해가 밝았습니다. 저는 기어코 혼자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제 주위는 고요하고 밖에는 새로운 햇살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앞에는 지난 연말, 새벽 다섯 시까지 즐겼던 크리스마스 파티의 흔적으로 남은 마음에 쏙 드는 트리와 미러볼이 보입니다. 연말에 어떻게든 새로운 사람을 만나 제야의 종 카운트를 함께 기다리는 장면을 꿈꾸기도 했으나, 이게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아직도 치유 중인 것 같습니다. 직장에서 몰래 눈물을 참고 (사실 못 참고 몰래 울기도 하고), 꿈에서도 여전히 그가 보이며, 사진을 다 지우진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제 일상이 아직도 실연으로 가득 찬 것은 아닙니다. 저는 조금 울고 가끔 공허함을 느끼고 되도록 웃으며 평범한 하루들을 잘 지켜내고 있습니다.
2.
새해를 맞이하기 싫었던 것은 두려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사람 없이 맞이하는 새로운 해가 두렵고, 꽤 오래 이어지고 있는 상실의 아픔을 2026년에도 가지고 가야 하는 게 무섭고, 새로운 사람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압박감도 겁나고 등등. 사실 어제-라고 말하지만 수백만 년 전과- 똑같은 해, 똑같은 자전 현상일 뿐인데 새해에는 어째서인지 모든 것을 깔끔하게 털고 정리한 채로 멋지게 시작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다 보니 내 상처와 두려움을 주렁주렁 끌고 가는 게 어때서?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지부진한 게 아니라 단지 치유의 과정이 계속되는 것뿐이니까요. 그렇다면 주저앉아 우울해할 필요 없이 그저 더 나아질 일만 있는 새해를 희망차게 맞이하면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3.
저는 오늘 지난 몇 년처럼 이른 아침 눈을 비비며 해를 보러 가는 대신, 최근에 만난 글 친구와 줌으로 만나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오전 9시가 되기 3분 전 줌을 켜서 초대 링크를 전송했습니다. 서로 졸린 목소리로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을 나누고 어색하게 허허, 웃었습니다. 그리곤 각자 음소거를 하고 화면 속 글쓰기에 몰두했습니다. 밖에는 여전히 해가 눈부시고 사방은 고요한 채로 2026년 첫 글쓰기가 시작됐습니다.
4.
이 새해 글쓰기는 제가 제안한 건데, 지금 글을 쓰면서 보니 그러길 아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해 아침부터 즐거운 성취감과 편안함이 올라오는 기분입니다. 직장인에게 각 잡고 글 쓰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으니까요. 더불어 내 마음과 상황을 돌아보고 정리해 보는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5.
요즘 저에 대해 말해볼까 합니다.
먼저, 축하해 주세요. 예스이십사 로얄회원이 되었습니다. 멸종위기사랑처럼, 멸종위기책의 시대에 그래도 열심히 책을 사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원래 정말 마음에 드는 책 아니고서야 소장하지 않는 편이기에 저도 로얄회원이 될 만큼 책을 구매해서 읽지는 않았는데요. 정말 읽고 싶은 책들(예를 들면 [절창]이나 [렛뎀이론]과 같은)을 도서관에서 기다리면 한참 뒤에나 읽을 수 있어 아쉬웠습니다. 특히, 저처럼 공허한 시간을 슬퍼하지 않고 몰입해서 보낼 수 있도록 무엇이든 찾아서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더더 욱요. 그래서 사서 읽기 시작하다 보니 등급이 올라갔는데, 책이 배송 오면 그렇게 뿌듯하고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역시 어릴 적 그대로 크는 건가 싶을 정도로 도서관에만 가면 행복하고 벅차올랐던 저의 유년시절 모습을 30대가 된 지금도 그대로 발견합니다. 어제 주문한 책들은 [애착 워크북], [안녕이라 그랬어], [편안함의 습격]입니다. 너무 좋은 시대에 태어난 덕에 집에서 손가락 한 번이면 원하는 책들이 다음날 집 앞으로 배송이 됩니다. 물론 예전처럼 도서관 차가 일주일에 한 번 집 근처로 오면, 엄마랑 신이 나서 책 버스에 들어가 한참 고르던 즐거움과 또 다르지만요. 이번 겨울에는 이 책들을 읽으며 보내볼까 합니다.
6.
운전실력도 많이 늘었습니다.
이제는 통근길이 눈에 훤해서 내비를 켜지 않고도 능숙하게 운전할 수 있습니다. 약 10개월 전, 제발 노래를 틀면서 드라이브해 보는 게 소원이라던 저는 어느새 라디오를 들으며 여유롭게 출근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제는 어느 아파트에 들러 당근마켓에서 구입한 라탄 원형 테이블을 트렁크에 실어오기도 했습니다. 차가 있다는 건 정말 편하고 든든한 것이더라고요. 마음에 드는 중고 물품을 쉽게 업어올 수도 있구요. 그렇게 해서 구매한 물품들이 벌써 상당합니다. 의자부터 조명, 캔버스, 식물화분, 테이블까지... 다음 주에 뜨개질 책도 옆 동네에 가서 사 올 예정이구요. 뿐만 아니라 어서 강원도나 경북 영주까지의 장거리 운전도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강원도는 그렇다 치고 왜 특히 영주냐면 예전 혼자 여행 갔을 때 기억 남는 것들이 몇 개 있습니다. 그곳에서 먹었던 아주 맛있는 수제케이크와 특이했던 무섬마을을 다시 한번 맛보거나 가보고 싶습니다.
7.
좋아하는 유튜버의 팬미팅도 가게 되었습니다.
실연하고도 제 삼시 세 끼 때마다 곁을 든든하게 지켜준 게 있다면 바로 이 유튜버의 영상일 겁니다. 사실 혼자 있을 때 웃음을 크게 터뜨릴 일이 많이 없는데, 저는 이 분의 영상을 보고 자주 그렇게 웃었습니다. 그래서 팬미팅 자리를 얻었을 때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습니다. 마치, 2025년 액땜하고 고생했다며 누가 큰 선물을 보내온 것처럼요. 2주 뒤에 가게 되는 침착맨 팬미팅이 저에게는 2026년, 아직까지는 가장 기대되는 일 같습니다. 피켓에 어떤 문구를 담으면 재치 있고 좋을까요?
8.
아직 근황을 다 전하지 못한 것 같은데, 글 친구와 쓰기로 한 1시간 30분이 다 되어갑니다.
9.
새해의 저는 무거운 일은 가볍게, 가벼운 일은 조금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어르신들이 늘 하던 인생을 '가볍게, 대수롭지 않게, 유쾌하게' 흘려보내는 미덕을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이런 절절한 상처도 너무 절절하지 않게, '그저 인생 내 마음대로 안되네, 원래 그렇지'라고 생각하면서요. 하지만 한없이 가볍다고 생각하는 친구와의 약속, 농담들에 있어서는 조금 더 세심함을 기울이고 싶습니다.
10.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되 그렇다고 너무 행복하진 마세요. 배가 아픕니다. 우리 모두 적당히 행복하고 적당히 불행한 삶을 솔직하게 드러내 보이며 잘 지내봐요. 가을에 시작한 저의 실연일기는 2026년 봄으로 이어지겠군요. 제가 괜찮길 바랍니다. 응원해 주세요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