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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May 21. 2019

여행을 준비하다가 싫증이 났다

아마추어 여행작가의 고민

  비행기 표를 끊는 순간이란 의당 설레면서도 무언가 불안해야 한다. 또 나름의 거금이 빠져나가는 것과 함께 곧 떠나긴 하겠다는 실감을 예비 여행자에게 선물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인천에서 출발하는 항공편을 구매하기 위해 여권 정보와 카드 번호를 기입하고 결제 요청을 눌렀다. 푯값이 빠져나가길 기다리고 있는데 설렘이나 긴장이 아니라 어딘가 개운치 않은 기분이 엄습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여행을 위해 비행기 표를 예매했지만 미묘하게 감정의 결이 달랐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 숨어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보통 이런 느낌은 막상 그 정체를 알게 되면 대수롭지 않은 일일 때가 많다. 이번에도 그런 것이라고 믿고 넘겼다.


  마음 한편의 찝찝함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된 것은 다음날이었다. 나는 결제가 완료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목적지와 떠나는 일정이 확정된 것을 보며 한시라도 빨리 여행을 실감하고 싶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때, 발권 대행사로부터 문자가 왔다. 등록한 카드는 지원되지 않으니 며칠 내로 다시 결제를 요청하지 않으면 항공편 예약이 취소된다는 내용이었다. 새로 카드를 등록해야 한다니. 홈페이지에 다시 들어가서 다른 카드의 정보를 또 입력해야 한다. 편리함에 얼마나 길들었는지 이제는 지문 인식 한 번으로 결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간단한 절차라도 귀찮게 느껴질 때가 많다. 따라서 재결제를 요구하는 문자에 짜증이 나는 것도 퍽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오류가 뭔가 바로 잡을 '기회'처럼 느껴졌다. 역시 이상했다.


  그때는 학원에서 업무를 보는 시간이었으므로 곧바로 재결제를 요청할 순 없었다. 준비하고 있는 여행에 대해 다시 생각할 시간이 생겼다. 나는 왜 간절히 바랐던 여행을 실천으로 옮기면서 일말의 찝찝함을 느꼈을까. 비행기 표가 한 번에 예매되지 않은 것은 또 왜 마지막 기회처럼 다가왔을까.


  여행기를 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 4학년을 마치고 떠났던 동남아시아 여행부터였다. 나는 스물둘 즈음부터는 언제가 글 쓰는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품고 있었다. 그리고 이십 대에 하고 싶은 일을 딱 하나만 더 꼽자면 단연 여행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별다른 결심도 없이 자연스레 여행기를 쓰기 시작했다. 서른이 되기 전에 책을 한 권 쓰고 싶다는 꿈은 있었지만 꿈은 이루어진다는 발랄한 믿음 같은 건 없었다. 


  동남아 여행기 역시 처음부터 책을 내겠다는 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 원고가 완성되고 운 좋게 출간 계약을 맺은 후에 수없이 고쳐 쓰는 과정을 거치기도 했다. 내가 원하는 대로만 쓰다가, 세상에 책을 내놓으려면 작가와 독자의 관계에도 관심을 가져야 함을 조금씩 이해해가는 시간이었다. 개인 블로그에만 게시되어 있는 글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실물의 책이 되려면 종이가 아깝지 않은 내용을 써야 한다. 독자는 작가가 쓴 글을 읽으며 정보를 얻거나 혹은 무언가 느끼거나, 아니면 읽는 행위 자체가 재미있기를 기대하며 돈을 써서 책을 구매하는 것이다. 여행책은 마땅히 갖추어야 하는 요소들이 있다. 사실 그런 의견 중에는 쉽게 동의하고 싶지 않은 내용도 있었다. 출판사에서 내가 '프로'가 아니라는 걸 안다는 듯한 어투로 하는 피드백에는 자존심이 좀 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글쓰기에 대해 단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기에, 책을 내는 과정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 자체가 귀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건 다 여행 이후의 일이었다. 정작 동남아를 여행할 땐 아무것도 몰라서 머릿속이 깨끗했다. 언제나 가고 싶은 방향으로 걸었고 느끼고 싶은 만큼만 느꼈다. 여행을 통해서 무언가 깨닫거나 성장하기를 바란 적도 있었지만 여행하며 그 이후의 구체적인 결과물에 욕심을 내진 않았다. 단지 자유로이 걸으며 여행하는 시간이 좋았다. 당시에는 그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꾸준히 여행기를 쓰면서 내 여행이 한 권의 책으로 나오면 정말 멋진 일이 될 것이라고 꿈같은 상상도 자주 했었지만, 여행이 마땅히 그런 기적 같은 일을 내게 선물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행은 그저 그 순간에 하루하루를 잘 보내면 된 거라고, 내일의 어떤 것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고 믿었다. 다른 모든 일이 그렇다 하더라도 적어도 여행만큼은 미래를 위한 시간이 되어선 안 되는 것이었다.


  여행만으로도 즐거운데 일상으로 돌아온 뒤에도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이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나의 여행 이야기가 읽히는 경험을 하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하나의 여행이 선사한 것으로는 차고 넘쳤다. 브런치에 쌓인 여행기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하나의 원고로 엮으면서도 책이 될 것이라고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쥐뿔도 없는데 가만히 있으면 누가 나서서 챙겨주나, 출판사에 보내나 보자' 하는 심정이었다. 감사하게도 내 첫 원고를 긍정적으로 봐준 출판사가 있었다. 계약이 확실시될 때까지 비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메일 한 통에 일희일비도 많이 했다. 내가 유일하게 관련된 소식을 전하여 경과를 함께 지켜본 한 친구는 그렇게 감정 기복이 심하고 심적으로 불안해 보이는 모습은 처음 본다고 말하기도 했다. 출간이 내게 생각보다 간절한 꿈이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 뒤로 약 일 년의 시간이 흘렀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나 홀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몇 번이나 탔지만 결국 출간은 무사히 진행되는 모양새다(이 글을 쓰고 약 3개월 후에 출간되었다). 완전 원고를 넘겨준 뒤로 본격적인 교정 작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내가 할 일이 많지 않았다. 새로운 여행 준비에 더 신경 쓰기 시작했다. 동남아 여행 때와 마찬가지로 여행지의 작가가 쓴 소설을 읽고, 해당 나라의 역사와 관련된 글도 조금씩 찾아서 읽었다. 지난 여행과 마찬가지로 여행기를 쓸 것은 당연했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여행기를 쓰더라도 출판사의 투자를 받을 수 있는 기획출판(원고의 집필 이외 책의 제작, 유통 및 홍보 등의 비용은 모두 출판사가 부담하는 방식)이 가능한 원고가 되도록 쓰겠다는 목표가 여행 준비 단계부터 뚜렷해졌다는 것이었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여행 원고 하나가 전부인 아마추어 여행작가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봤다. 별다른 고민 없이 결정했던 지난 여행지들과 이번 목적지는 달라야 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지역을 하나로 부를 수 있는 정도의 범위, 예를 들어서 '인도', '동유럽', '이베리아반도' 등 정확한 명칭으로 부를 수 있는 지역적 경계를 두고 여행기를 쓰는 것이 출간 가능성을 높이기에 유리해 보였다. 특정 지역에 포커스를 맞추지 않고서는 '퇴사하고 세계 일주' 종류의 여행 에세이가 옆집 아이 이야기처럼 쏟아지는 여행 출판시장(실제로 국내 한 대형 출판사의 여행 편집부로부터 받은 피드백이다)에서 경쟁력 있는 여행 원고를 쓰기란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경쟁력 없는 원고를 쓰는 작가가 출판사의 투자를 받기란 요원한 일이다.


  만약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했다면 하바롭스크를 거쳐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다녀오는 것이 짜임새 있는 원고를 쓰기에 좋다. 아니면 요즘 핫한 쿠바에서 한 달쯤 살다 온 이야기를 쓰면 출간 경쟁력이 있는 원고가 될 수도 있겠다. 단연 최고의 인기 여행지로 떠오른 베트남의 도시 곳곳을 파헤치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반대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작한 여행이 베트남을 거쳐 대뜸 파리에서 끝난다면 그 세 도시의 이야기를 하나의 원고로 묶기는 조금 애매할 수 있다. 그 정도로 관련성이 약한 도시들을 묶으려면 세계 일주 에세이 정도는 되어야 까다로운 출판사의 검열을 통과할 수 있지 않을까.


  여행을 준비하는 동안에는 내 상태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책을 내고야 말겠다는 생각에 너무 깊이 사로잡혀 있음이 점점 보이기 시작한 것은 비행기표가 취소된 그 무렵이었다. 언제는 여행지 숙소에서 잠들기 전에 다음 날 갈 곳을 살펴보더니, 이번엔 여행이 두 달이나 남았는데도 세세한 방문 장소까지 살펴보고 있었다. 특정한 명칭으로 부를 수 있는 지역을 기준으로 삼았고 그곳에서도 완결성을 갖출 수 있는 여행 경로를 다방면으로 짜보는 일에 열중했다. 이번에야말로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여행을 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렇게 특정 지역을 꼼꼼하게 살피고 장시간 체류하는 것이 자유로이 발이 가는 데로 돌아다니며 쓴 여행기보다는 책으로 나올 확률이 높을 것이라는 판단이 결정적이었다. 아마추어 여행작가는 반드시 책을 쓰겠다는 집념으로 완결성을 갖출 수 있는 경로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제멋대로 정의한 '짜임새 있는 여행'의 시작 지점으로 가는 비행기표가 오류로 예약 취소된 상황이었다. 같은 비행기표를 다시 예매하려는데 문득 싫증을 느꼈다.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찝찝함은 이제 무언가 잘못된 건 아닌가 하는 의심으로 바뀌었다.


  여행이란 게 내게 무엇이었을까. 어느 때는 일상의 망각을 가져다줄 수단이었고 지금보다 어린 날에는 성장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라 여기기도 했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도피처인 동시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통로이기도 했다. 어쩌면 모든 여행은 항상 조금씩 달랐지만 언제나 같은 점이 있었다. 여행이야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시간이라는 것. 그것은 가장 자유로운 현재였다. 무수히 많은 오늘이 내일의 희생양이 되지만 여행만큼은 그래선 안 되는 것이었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보내는 오늘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결국 내일은 또 다른 오늘이 되고 만다. 하지만 여행만큼은 언제나 현재에 충실한 시간이었다.


  이 삶에서 해보고 싶은 일이 많다. 그중에서도 하나만 고르자면 아마도 첫째는, 재미나 의미 중 적어도 하나는 있는 이야기를 꾸준히 쓰는 작가가 되는 것이겠다. 하지만 여행지에서만큼은 다른 무엇도 아닌 오직 여행자이고 싶다. 그런데 책을 쓰겠다는 꿈은 여행을 발판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여행 중에는 언제나 자유로이 걷고 싶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준비 단계부터 자유란 반쯤 뜯겨나가 버렸다.


  새로운 곳을 자유로이 걸을 수만 있다면야 어디로 향해도 상관없다. 길을 잃는 순간조차도 걸을 힘이 되는 것이 여행이었다. 그러면 출간 가능성이 높은 원고를 쓸 수 있는 곳을 여행지로 정해도 결국 상관없는 것이 아닌가, 자신에게 물어도 봤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어디로 향해도 상관없는 여행이 아니었다. 준비 단계는 물론 여행을 기다리는 마음부터가 너무 많이 변했다. 이대로 떠난다면 여행지에서 나의 시선은 또 얼마나 변해있을까. 그저 여행이라면 목적지가 어느 곳이든 좋은 사람에게, 반드시 결과물을 남기겠다는 생각이 끼어들어서 만들어진 여행 경로는 너무 작위적이었다. 이제 싫증이 나서 그 계획을 구겨서 휴지통으로 던지지 않고서는 못 배길 상태가 되었다.


  예매했던 표는 재결제 기한이 경과하여 취소되었다. 그동안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마침내 '뇌피셜'에 빠진 아마추어 작가에서 순진한 여행자로 돌아온 것 같다. '책 쓰기 유리할 것 같은 장소'라는 멋대로 정의한 기준은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여행을 그려 보기로 한다. 완결성은 책이 되려는 원고라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요소인지 몰라도 여행이 갖추어야 할 조건은 아니다. 원래 여행은 어딘가 부족한 법이다. 그러니 완결성은 여행자가 아니라 작가일 때 애써보도록 하자. 비행기 예약이 취소된 것은 조금 귀찮긴 해도 천만다행인 일이다. 더 나은 내일을 목표로 하지 않는, 오직 오늘을 위한 여행을 되돌려 놓을 기회를 얻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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