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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재희 Apr 16. 2023

부딪혀본 장애물은 크기가 보인다

"대리님 요즘 어디서 싸움하고 다니세요?"


매일 같이 반복되던 어느 날 점심시간에 직장 동료가 나를 보더니 문득 물었다. 주먹과 팔 곳곳에 붙어 있는 반창고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하루이틀도 아니고 거의 매일 양팔에 밴드를 서너 개씩 붙이고 출근하는 직원이 누군가에게는 좀 수상해 보일 수도 있겠다. 물론 '싸움하냐'는 질문은 농담이었겠지만 사실 맞는 말이기도 했다.


'예, 요즘 저녁마다 암벽이랑 싸웁니다.'



클라이밍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유난히 팔을 자주 긁히는 편인 것 같다. 실제로 클라이밍홀드에 긁혀 팔에 피가 철철 나는 일이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반복되고 있다. 다치는 패턴은 거의 매번 똑같다. 잡고 있는 홀드와 진행할 홀드 사이에 있는, 문제에 포함되지 않는 색이 다른 홀드(볼더링 문제는 일반적으로 정상까지 색이 같은 홀드로 구성되므로 경로에 있는 다른 색의 홀드를 이용하면 반칙이다)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움직이다가 다치게 된다. 목적지만 보고 힘껏 팔을 뻗다가 원래 목표에는 닿지도 못하고 진행 경로에 튀어나와 있는 홀드에 팔을 긁히는 것이다.


형편없는 자세로 암벽에서 추락해 매트를 한 번 뒹군 다음, 쓰라린 고통을 참으며 연고를 바르고 올라가려던 암벽을 다시 보면 항상 그런 생각이 든다.


'왜 저 큰 홀드가 안 보였지?'


물론 여유가 없어서 그렇다. 나 같은 클라이밍 초심자는 오버행(바닥 쪽으로 기울어 있는 벽)에 매달려 있으면 빠르게 팔에 힘이 빠진다. 그러니 마음이 급해져 다음 홀드로 다급하게 팔을 옮기려 하는데, 그 과정에서 미처 파악하지 못한 장애물과 부딪힌다. 아무리 중간에 장애물 같은 홀드가 섞여 있어도, 평소 도전하는 수준보다 낮은 난이도의 문제에서는 팔을 긁히는 일이 거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니 목적지로 향하다 다치지 않으려면 기초가 되는 근력이나 지구력 같은 것들을 충분히 준비해두어야 한다.


하지만 클라이밍의 묘미는 긁히고 깨지면서 새로운 목표에 도달하는 순간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 이건 진짜 죽어도 못해' 싶었던 구간을, 수십 번 도전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넘어서게 된다. 그리고 아무리 어렵게 성공한 문제라도 한 번 해낸 뒤로는 언제든 다시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한 번 팔을 긁힌 코스에서 다시 다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 번 부딪혀 보면 다음부터는 그 장애물의 크기가 보여서 더 잘 넘어설 수 있게 된다.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과정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스포츠가 클라이밍이 아닐까.




양팔 곳곳에 늘어가는 흉터가 가끔은 신경 쓰이기도 한다. 상처는 크고 작은 흔적을 남긴다. 한 번 크게 다친 부위는 새살이 돋아나도 오랫동안 티가 난다. 더 단단해지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몇 번을 아파도 피부의 연약함은 그대로다. 근육은 상처를 내고 회복하는 과정에서 더 크고 강해진다고 하는데 왜 피부는 그렇지 못할까.


사람의 마음은 피부와 근육 중 어떤 것을 닮았을까. 상처를 입으면 점점 더 강해지는 근육일까, 아니면 회복할 수 있을지언정 흔적이 남고 연약함도 그대로인 피부에 가까울까. 매일같이 다치고 아물기를 반복하는 요즘은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릴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결론을 짓는 것은 상처가 다 나은 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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